대숲집 옥자
권 영 상
우편물을 부치러 우체국에 들렀다가 그 길로 이천행 버스를 탔다.
16년 전, 이천에서도 버스로 꽤나 들어가는 시골학교에 나는 잠시 머무른 적이 있었다. 그 곳이 가끔은 자꾸 그리웠다.
그러나 찾아간 시골마을은 내 기억 속의 마을이 아니었다. 아파트도 들어섰고, 면사무소는 잔뜩 위용을 갖춘 3층 빌딩으로 바뀌어 있었다. 예전에 즐겨 가던 대폿집과 늘상 점심을 먹던 식당을 찾았지만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잠시 근무하던 학교도 많이 변해 있었다.나는 그 예전, 체육시간이면 아이들과 함께 곧잘 가던 개울가를 찾았다. 개울둑의 느티나무만이 홀로 나를 반겼다. 예전 같으면 아이들로 붐볐을 개울도 싱겁게 누워 있었다.
불현듯 건너편 개울둑을 타고 오른 발가벗은 아이 하나가 개울물로 덤벼들었다. 그 뒤를 따라 아이의 엄마임즉한, 바구니를 들고 차양이 긴 모자를 쓴 여인이 개울에 들어섰다.
여인은 아이의 손목을 잡아 얼굴을 씻기고 등허리며 다리를 씻긴다. 그러더니 아이와 함께 내 곁을 슬몃 지나갔다. 옥수수의 뭉툭한 가지를 따 담은 바구니를 힘겹게 옆구리에 낀 채로, 몇 걸음 가던 여인이 모자를 벗고 돌아섰다.
"저 혹시..."
그렇게 말하는 여인 입 모양이 어디서 본 듯했다.
그 아이였다.
여인은 내게 부끄러운 듯 "저, 옥자라고 아세요?" 그랬다.
맞았다. 대숲집 옥자였다.
"선생님, 미안해요."
어리둥절해하는 내게 옥자가 지난 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선생님께서는 저에게 책을 읽히고 나면 늘 그러셨지요. 목소리와 입 모양이 참 이쁘다구요. 그래서 절 보고 선생님은 그랬지요. 아나운서감이라고요."
말을 마치고 옥자가 피식 웃었다.
서른이 넘은, 시골 아낙이 된 자신이 부끄럽다는 웃음 같았다.
"요즘도 뉴스를 볼 때면 가끔 선생님 생각을 해요."논밭 사잇길을 걸어 마을로 돌아오면서 이번에는 내가 부끄러웠다. 당당히 농부의 아내가 되지 못하게 한 게 내 책임 같았다. 그 동안 옥자는 어쩌면 현실을 살면서 또한 구름 위의 꿈을 살아왔을지도 모른다."내가 말을 아무렇게나 했구나."
나의 미안함에 옥자가 야무지게 대답했다.
"지금은 농사일을 하겠지만 다음에는 꼭 할 거예요."
"다음에라니 언제?"
나는 놀란 눈으로 물었다.
"다시 태어나면요."
옥자는 당돌하게 말했다.사람은 무슨 힘으로 사는가.
나는 그날, 버스를 타고 돌아오면서 내내 그 생각을 했다.
권영상 산문집 <뒤에 서는 기쁨> (좋은생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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