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금이 없는 교실
권 영 상
예전, 소금강이 그리 멀지 않은 연곡의 어느 시골 학교에서 나는 교생 실습을 했다. 학교 곁엔 방죽이 있고, 근방엔 과수원이 많았다. 전형적인 농가 마을이었다. 내가 맡은 학년은 6학년. 남자애들 스무남은 명과 여자애들 십여 명의 혼합반이었다. 그 아이들은 찾아간 나를 무척 반겼고, 그들만큼 나도 그들을 만난 게 행복했다.
그들을 만난 첫날이었다.
담임선생님은 점심 끝에 내게 음악시간을 맡겼다. 갑작스레 출장을 가야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해야할 단원은 한용희 작곡의 <푸른 잔디>였다. 나는 대학에서 배운 부족한 실력으로 풍금 앞에 앉았다. 두 발로 조용히 페달을 밟아 먼저 전곡을 들려 주었다. 그리고 한 소절씩 불러나갔다.
“풀 냄새 피어나는 잔디에 누워....”
좀 서툴렀지만 아이들은 내 노래를 받아 예쁘게 불렀다.
“새파란 하늘가 흰구름 보면 가슴이 저절로 부풀어 올라 즐거워 즐거워 노래 불러요.”
아이들은 이 낯선 젊은 교생의 부족하긴 하지만 노래에 실린 감정을 그대로 잘 읽어냈다.
그날 수업은 무사히 마쳤다. 아이들을 보내고 난 뒤 나는 혼자 빈 교실에 남아 풍금 연습을 했다. 긴장을 핑계로 더 이상 서툴게 풍금을 켤 수 없었다. 오월 오후의 햇살이 은은하게 교실로 스며드는 그 시각에 내 손에서 만들어지는 풍금소리가 교실을 가득히 채워 나갔다. 곡의 마지막 소절을 켜고 건반에서 가만히 손을 내려놓으면 풍금소리 사라지는 여운이 느껴졌다. 달고 정겨운 여운이었다. 사과를 먹고난 뒤 입술에 남는 달콤함 같은, 마치 친밀한 사람끼리 악수를 하고 헤어졌을 때 한참이나 손에 남는 체온처럼 여운이 길었다.
그 여운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복도 유리문에서 이쪽을 들여다 보던 아이 하나가 슬몃 사라지는 게 보였다. 사내 아이였다. 풍금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내 시선을 느끼자 자리를 피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일어나 창가로 갔다. 방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염소가 풀을 뜯고, 공부를 마치고 간 아이들이 놀고 있다. 방죽길을 뛰고 구르고 떠드는 소리.... 풍금소리가 멎은 뒤에야 아이들의 장난소리가 들렸고, 내 코를 은근히 자극하는 교실 바닥의 고소한 들기름 냄새가 났다. 쪽마루로 된 교실 바닥은 들기름에 젖어 촉촉했다. 며칠 전에 기름걸레질을 한 모양이다. 그렇게 시작된 교생 실습 4주는 금방 지나갔다.
그 때, 나를 지도해 주시던 담임선생님도 교실에 남아 <푸른 잔디>를 길게 켜주셨다. 우리는 그 풍금소리를 배경으로 눈물을 닦으며, 손을 흔들며 작별을 했다.
내 교생 시절의 향수는 풍금소리로 오래도록 내 마음속에 남아있다.
그 후, 서울로 올라와 25년이 지난 뒤였다. 모 초등학교로부터 ‘작가와의 만남’이란 수업 요청을 받았다. 얼마만에 찾아가게 되는 초등학교인가.
그 옛날의 향수도 있고 해 기꺼이 응했다. 수업을 다 마치고 교실을 둘러보던 나는 놀랐다. 교실 창가쯤에 놓여있던 그 옛날의 풍금이 보이지 않았다. 지금은 인터넷 사이트에 만들어진 음악만을 쓸 수 있게 됐다는 거다. “클릭, 클릭만 있을 뿐이에요.” 지시 버튼만 눌러줄 뿐 악기가 따로 들어설 자리가 없다는 거다. 여간 서운하지 않았다.
이제 중고등학교도 음악은 다른 예체능 과목과 같이 한 학년에 몰아서 한다. 그러니까 단 일 년만 음악 맛을 본다. 내가 풍금에 미련을 두는 것은 한낱 지난 시절에 대한 향수만은 아니다. 아이들이 점점 거칠어지는 이유를 거기에서 찾아보고 싶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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