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에서 본 어린왕자 권 영 상
오후 5시. 퇴근이다.
가방을 챙겨 들고 교문을 나섰다. 늘 다니던 골목길로 접어든다. 골목 어귀 은행나무 가로수빛깔이 노랗다. 황금빛이다. 황금빛 골목길을 밟아 언덕을 내려온다. 소화아동병원 앞길에서 신호등을 건넌다. 신호등을 건너면 바로 서울역이다. 4호선 전철을 타자면 서울역사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거나 층계길을 걸어 올라야 한다. 층계는 까마득히 높다. 불편하긴 해도 에스컬레이터 대신 층계길을 택했다.
돌층계를 꼭꼭 밟아 반쯤 오르다가 고개를 젖혀 층계 위를 쳐다봤다. 노숙인 둘이 비스듬히 층계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다. 서울역이라면, 또는 서울역 주변이라면 아무데서나 볼 수 있는 이들이 노숙인이다. 그들은 역사의 추녀 밑에, 또는 역사주변 건물 밑에 주저앉아 술을 마시거나, 아니면 얼굴에 햇빛을 받으며 힘없이 쓰러져 잔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거나 길가는 사람들에게 괜히 객기어린 욕설을 하거나 삿대질을 하기도 한다. 이 역사를 지나 4호선을 타러 가야하는 내게 이런 일은 늘 만나는 일상이다.
두 노숙인을 보며 나는 아무 관심 없이 층계를 올랐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늘 보아오던 그런 노숙인들과는 뭔가 달랐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바라봤다. 한 사람은 눈썰매를 타듯 층계에 매트를 깔고 그 위에 비스듬히 누워 담배를 피고 있었고, 그 곁의 어깨에 담요를 두른 남자는 한 쪽 팔을 층계에 세우고 앉아 뭔가를 다정히 옆사람에게 이야기해 주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오랜 날을 함께 한 우애좋은 형제 같았다. 얼굴에 수염이 나있고, 담배를 물고 있긴 해도 왠지 이 세상과 동떨어진, 가난도 부자도 없는 그런 세상의 착한 이들로 보였다.
그러니까 층계에 앉은 두 사람의 노숙인은 가장 편안한 자세로 이 일몰을 바라보고 있었던 거였다. 그 순간, 이들이 이웃 먼 별에서 이곳으로 노을을 보러온 어린왕자 같이 느껴졌다. 일몰을 보기 위해 하루에도 마흔네 번씩이나 별을 옮겨 다닌다는 어린왕자.
두 노숙인의 얼굴은 금빛 노을 때문인지 세상의 고단한 흔적이라곤 없어 보였다.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체구의 순수해 보이는 얼굴빛과 눈매. 그들의 눈빛엔 지금 이 순간만 있을 뿐 숨겨진 그늘이라곤 없어보였다. 반백이 다 된 그들의 머리칼 때문일까. 고통을 고통이라 생각해 보지 않은, 걱정을 걱정이라 생각해 보지 않은 그런 편안한 표정이었다. 지금 그들은 별을 옮겨다니며 겪었을 법한 이야기나 별 어딘가에 심어 가꾸고 있을 장미에 대한 이야기, 아니면 여우와 친구되는 법에 대해 저렇게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그들에게서 눈을 떼고 역사 쪽을 돌아다 봤다. 맞다. 여기가 우주의 어느 행성임이 분명했다. 십여 명의 사람들이 이들 뒤쪽에 서서 이 장대한 노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들은 어쩌면 우주기차를 타고 이제 막 6번 출구로 나왔거나 다른 별로 떠나기 위해 잠시 기다리는 여행자들 같았다. 어디선가 기적소리가 울려올 것 같은 지금은 11월의 오후 5시 20분. 근심도 걱정도 없는 먼 별에 내가 서 있기를 잠시 염원해 본다.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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