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내 마음의 빈 자리

권영상 2016. 6. 6. 19:44

내 마음의 빈 자리

권영상

    

 


눈을 뜰 무렵. 이미 창밖은 새들 울음소리로 요란하다. 새들은 부지런하다. 동이 트기 시작하면 빛을 찾아나오는 게 새들이다. 새소리 중에서도 곤줄박이 울음 소리가 유난히 귀에 쏙쏙 들어온다. 뭔가 절박함이 있다.



요 며칠 동안 집 주위를 돌던 그 곤줄박이인 듯 울음소리가 귀에 익다. 가만히 창을 열었다. 지붕 위에서 휙 날아내린 새가 뜰앞 배롱나무 가지에 앉았다. 맞다. 곤줄박이다. 이쪽 창을 향해 보채듯 운다.



그러더니 창 밖에 세워둔 우편물통에 날아와 앉는다. 거기 앉아 깝죽깝죽 또 몇 번인가 울더니 우편물통 속으로 쏙 들어갔다. 방에선 그게 보이지 않지만 그건 분명했다. 곤줄박이 울음 소리가 우편물통 속에서 울려났다. 마치 빨간 우편물통이 울림이 좋은 관악기 같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깡총 날아나와 배롱나무에 가 앉더니 이내 고추밭 너머 산으로 가버렸다.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아침을 준비하고, 준비한 아침을 먹고, 텃밭에 나가 강낭콩 심은 골의 김을 매고, 모종한 결명자를 돌보고, 토마토 곁순을 따주고 물뿌리개로 물도 주었다. 그러고 방에 들어가면 본디 내 임무인 원고를 쓴다. 내 일상이란 빈틈이 없다. 일주일에 한번씩, 안성에 내려오려니 일이란 게 더없이 많다.




좀 쉬자고 내려오지만 정작 내려와 보면 편히 앉아 있을 시간이 없다. 아니, 시간이 없는 게 아니라 내 일상의 틈이 생길까봐 억지 일에 매달리는지 모른다. 빈 틈이라도 생기면 내가 외로워할까봐, 내가 적적해할까봐, 내가 나를 연민의 눈으로 바라볼까봐 두려워 그럴지 모른다. 그런 나 때문에 나는 시간의 노예가 되었다. 일에 매여사는 일의 노예가 되었다. 그런 까닭에 그 어떤 잡념도 끼어들지 못하도록 내 일상이 팍팍해졌다.



물뿌리개에 수돗물을 받아가다가 우편물통을 들여다 봤다. 우편물 세 통이 들어 있다. 인터넷 사용고지서와 전깃세, 그리고 태양열 설치에 관한 것. 우편물통도 서울에서 가져온 판자쪽으로 내가 만들었다. 충분하다 싶게 가져왔는데 만들어보니 생각보다 나무가 많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예쁘긴 해도 좀 작다.




그나저나 곤줄박이는 아침에 왜 우편물통을 드나들었을까. 둥지 틀 자리를 보러왔던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의 울음소리가 절박했으니까. 그렇다면 곤줄박이는 요 며칠내내 우리집 지붕도 두드려 보고, 배롱나무도 살펴보고, 창문 위에 박혀있는 외등에도 앉아 보고, 보일러실 연통 위도 살폈을 것이다.




내 눈에 건너편 산으로 허전하게 날아가던 곤줄박이 뒷모습이 떠오른다. 둥지 틀 자리 하나 찾을 수 없음에 낙심해 하는 그런 몸짓 같았다. 내가 봐도 내가 사는 집엔 작은 들새 한 마리 은신할 곳이 없다. 둥지를 틀려면 모름지기 좀 어수룩한 데가 필요하다. 사람 눈길이 닿지않는 좀 비어 있는 틈이 필요하다. 그런데 지금의 반반한 집들이란 게 그런 틈이 있을 리 없다. 더구나 내 성미가 새 한 마리 들어설 자리를 두지 못한다. 사람을 가까이할 줄 아는 곤줄박이가 그런 나와 내 집을 모를 리 있겠는가.



우편물통에 들어가 보고 알았을 것이다. 옴치고 들지 못할 만큼 비좁은 공간, 그게 내가 만들어놓은 내 안의 팍팍한 공간이다. 나는 둥지 틀만한 데가 있을까 하고 집을 한 바퀴 돌았다. 그 한 바퀴를 돌면서 내 마음의 내가 지어놓은 집도 살폈다. 누군가 날아와 한두 달쯤 알을 낳고 새끼를 치고 날아갈만한 그런 빈 자리가 있는지를 더듬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