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간 길을 다시 밟아오는 게 싫었다
권영상
아침에 휴대폰을 챙겼다. 동네 산에 갈 때엔 일부러라도 휴대폰을 가져가지 않는다. 산에 오를 때조차 세상일에 나를 매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어쩔 수 없다. 내가 관여하는 출판사의 전화가 있다.
바지 주머니에 휴대폰을 넣고 아파트 후문과 맞닿아 있는 산길에 들어섰다. 휴식삼아 하는 산행이니 쉬운 코스를 한 바퀴 빙 돌아올 생각이다. 산 중턱에 설치해놓은 운동기구를 지나치다 말고, 윗몸일으키기 대여섯 번을 하고 일어섰다. 그때에 할아버지 한 분과 마주쳤다. 가볍게 인사를 드렸다. 이 산에서 몇 번 뵌, 대화를 하는 사이는 아니어도 아는 체 정도는 하는 그런 분이다.
운동기구가 있는 곳을 지나면 잣나무숲길이 나온다. 거기에 들어서면 서늘하다. 깊게 깊게 숨을 들이쉬며 가는 갈림길에서다. 길옆 어린 잣나무 가지에 열쇠가 매달려 있다. 오색 실로 땋아 만든 고리에 노란 금속열쇠 두 개. 얼핏 보아 책상 열쇠거나 자동차 키는 아니다. 집 현관 열쇠쯤으로 보인다. 나보다 앞서 가던 누군가가 열쇠를 주워, 주인 눈에 띄기 좋도록 길가 나뭇가지에 매달아 놓은 모양이다.
열쇠를 잃어버린 그는 누구일까. 잠겨있는 집에는 어떻게 들어갔을까.
예전엔 나도 가끔 열쇠를 집에 놓고 출근하는 때가 있었다. 그럴 때 아무도 없는 빈집에 당도하면 낭패다. 그럴 때면 할일없이 동네 커피숍에 가 식구들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거나, 아파트 마당 등나무 그늘 벤치에서 막연한 시간을 보냈다.
중요한 열쇠라면 지금 그 사람은 자신이 걸었던 이 길을 더듬어 오고 있을지 모른다. 그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잃어버린 열쇠를 여기에서 찾게 되기를 바라며 나는 그 자리를 떴다.
본디 코스대로 산등성이를 한 바퀴 빙 돌아 남부순환로 쪽으로 내려설 때다.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이 생각났다. 손을 대어보니 없다. 다른 주머니에도 없다.
오던 길을 되짚어 돌아섰다. 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갈림길 나뭇가지에 매달린 열쇠를 보는 둥 마는 둥 걸어 윗몸일으키기를 했던 곳으로 부랴부랴 내려왔다.
“저어, 혹시.....”
올라올 때 인사를 드렸던 그 할아버지다. 그 할아버지가 내게 다가왔다. 할아버지 손에 내 휴대폰이 들려있었다.
“거기 양반 거 같아서 여태 기다렸습니다.”
할아버지가 손에 들고 있는 휴대폰을 내게 내밀었다. 윗몸일으키기 기구 밑에 떨어져 있더라는 거다. 뭔가 잃어버리면 가던 길을 되짚어 온다는 걸 알고 여기서 기다리셨다는 거다.
나는 허리를 숙여 몇 번이고 고마운 인사를 드렸다. 교직에 계시다가 오래 전에 퇴직하신 분이셨다. 마을에 내려가 차라도 한잔 대접하고 싶었지만 한사코 사양하셨다.
혼자 산길을 내려오며 오늘에야 안 게 있다. 늘 산을 올랐어도 한 바퀴 빙 돌아왔지 올라간 길을 되짚어 내려온 거는 오늘이 처음이었다는 사실이다. 같은 길을 고대로 되돌아오는 게 싫증난다고 믿었다. 그런데 오늘은 잃어버린 휴대폰 덕분에 올라가던 나의 길을 꼼꼼히 살피며 내려왔다. 여태 나는 반복의 싫증 때문에 내가 한 일을 되돌아보는 걸 싫어한다. 하지만 내가 간 길을 되짚어 오느라 나는 잃었던 나의 것을 찾았다.
산을 다 내려올 때쯤 휴대폰이 울었다. 연락을 주겠다던 출판사다. 마치 잃어버린 목소리를 되찾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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