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여기 지서 아무개 경위입니다

권영상 2016. 5. 22. 12:32

여기 지서 아무개 경위입니다

권영상




요 며칠 전이다.

고추 모종과 토마토 모종을 사려고 차를 몰아 안성이 가까운 소도시의 시장 길로 진입해 들어갔다. 초입부터 길 양편에 차들이 빼곡히 주차해 있었다. 장날인 게 분명했다. 주차할 자리 하나 얻을까 하여 천천히 차를 몰아나갈 때였다.




탈칵, 하는 소리가 오른편 사이드미러에서 났다. 내 차의 사이드미러가 길가에 주차해 있는 차량의 사이드미러를 건드린 듯했다. 사이드미러는 탄력성이 있으니까, 순간 내게 유리하도록 머리가 돌아갔다. 속력을 낸 것도 아니니 충격이랄 것도 없었겠지, 그러며 천천히 현장을 떠났다. 시장 주변엔 주차할 공간이 없어 시장을 벗어나 개울가 둑에 차를 세웠다. 나는 급히 차에서 내려 사이드미러를 살폈다. 다행히 아무 흔적이 없었다.




'그 차도 괜찮겠지.'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모종을 사러갔다. 불과 200미터도 안 되는 길을 가는 사이, 내 마음이 다시 바뀌었다. 괜찮겠지, 하던 생각이 ‘뭔가 일이 커졌으면 어쩌지.’로 바뀌었다. 마침 차 안에 있던 운전자가 그냥 가는 내 모습에 화가 나 경찰에 신고라도 했을까봐 마음이 불안해졌다. 사고가 있었던 시장길로 발길을 옮겼다. 몇 걸음 가는 사이, 분노한 차 주인과 드잡이질이라도 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가슴이 쾅쾅 뛰었다. 나는 다시 돌아섰다.




모종 마흔 포기를 사들고 안성 집에 내려왔다. 뜰 마당에 휴대폰을 놓고 텃밭에 모종을 심었다. 그 사이에도 경찰이 차를 몰고 들이닥칠 것 같아 어디서 쿵, 하고 차 문 닫는 소리만 들려도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이 일을 아내에게 말해야 되나 마나. 아내는 서울 집에 있는데, 괜히 말했다가 이런저런 잔소리를 들을 것 같아 그 생각마저 접었다.

아직까지 아무 연락이 없는 걸 보면 그쪽에도 별 이상이 없는 모양이다, 하고 편안히 마음을 돌려먹었다. 바로 그때였다. 휴대폰이 요란히 울었다. 다른데서 온 전화이기를 바라며 휴대폰을 열었다.




“경찰지서 아무개 경위입니다.”

결국 올 것이 오고 말았다. 피해자 사고 신고가 들어와 블랙박스 판독 후 전화를 한다며 왜 현장에서 해결하지 않았냐고 나를 탓했다.

“처음엔 괜찮겠지 하다가 나중엔 솔직히 현장에 가보기 무서워 그냥 왔습니다.”

내 말에 당사자들끼리 해결하라며 피해자의 전화번호를 일러주었다. 

“그분이 화 나 있을 텐데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요?”

나는 어처구니없게도 다른 사람도 아닌 경찰에게 그걸 물었다. 그 순간 내가 기댈 데라곤 그 경찰뿐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보상하시면 됩니다.”

그러고는 전화를 끊었다.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 피해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젊은 여자분이었다. 사이드미러가 깨어져 땅에 떨어졌다는 거다. 내 사과를 받고난 그분이 나를 타이르듯 말했다. 사고 났을 때 왜 자신을 찾아 해결하고 가지 그냥 갔느냐, 차 몰다보면 사이드미러 부딪히는 거야 보통 있는 일 아니냐. 그만한 사고가 무섭다면 어떻게 이 거친 세상 살아가실 거냐! 목소리 들어보니 연세도 지긋한 분이신데, 만나 서로 얼굴 보면 불편해 하실 것 같으니 자기가 알고 있는 피해 보상 방법을 알려주겠다며 그분이 한 동안 통화 끝에 전화를 끊었다.




모처럼 아내의 도움 없이 일을 처리하리라 했는데 결국 아내의 잔소리를 그이에게 듣고 말았다.

며칠 전, 모 연예인이 자신이 몰고 가던 차로 교차로 신호등을 들이받았다는 뉴스가 있었다. 그때 그이는 사고를 낸 후 현장을 피해 있었다. 나중에 왜 그랬냐는 말에 그가 한 말이 떠올랐다. ‘솔직히 무서워서 피했다.’ 그랬다. 

전 같으면 단번에 에이, 변명도 궁색하지! 했을 텐데, 이번만은 달랐다. 나는 침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