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사람들이 다 사라졌다

권영상 2016. 5. 22. 11:46

사람들이 다 사라졌다

권영상





자고 일어나니 사람들이 다 사라졌다. 집안이 텅텅 비었다. 길거리도 텅 비어있기는 마찬가지다. 어디에도 사람 그림자 하나 없다. 한꺼번에 행성으로 이민을 갔거나 나만 모르게 지구를 떠났는지 모른다. 나를 닮은 인종이라고는 없다.

거리가 불빛에 데인 것처럼 뜨겁고 번쩍인다. 가끔 가던 치과 간판이 안과로 바뀌었다. 문을 열고 안과에 들어섰다. 역시 사람이라곤 없다. 의사가 앉았던 자리에 인조인류가 앉아 진료를 하고 있다. 낡은 안구를 신제품 안구로 교체하고 있는 중이다.




아내와 자주 가던 슈퍼에도 들러봤지만 마찬가지다. 물건 값을 계산해주던 무뚝뚝한 아줌마 대신 예쁘고 지적인 인조인류가 웃음을 머금고 서 있다. 퍼머머리가 인상적이다. 카센터도 역시다. 봄마다 붉은 띠를 머리에 두르고 임금 인상을 요구하던 직원들 대신 인조인류들이 공구를 잡고 느긋하게 노는 듯 일하고 있다.




‘고급 일자리 창출’을 부르짖던 길 건너 여성회관 5층 건물은 여행사가 되어 있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여성 인조인류들이 일자리를 찾느라 고민하는 대신 카시오페이아나 페가수스로 떠나는 별자리 여행에 관한 일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그들 중 나이 지긋한 인조인류에게 다가갔다.

“혹시 인간들이 어디로 다 사라졌는지 알 수 있을까요?”

그는 인간이라는 말에 묘한 향수를 느끼며 머리에 저장된 오래된 기억을 더듬는 듯 했다. 그러더니 수십만 년 전에 사라진 아득한 행성을 이야기하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인간이라는 말에 대한 희미한 정보가 있네요. 그들은 한결같이 노동에 매달렸군요. 오직 일자리만이 행복을 추구하는 원천이라고 믿었던 듯 합니다. 그들은 일과 일자리에 대한 집착이 강했고, 남보다 더 많이 갖기 위해 치열하게 싸웠군요. 불행하게도 당신이 원하는 그들에 대한 행적은 더 이상 없습니다. 가여운 그들을 한번 만나보고 싶군요.”

나는 그에게 내가 그 인류 중의 한 명이라고 말하려다 멈추었다.




우리는 그때, 일자리 문제로 끝없이 갈등했다. 일자리가 없거나, 가지고 있는 일자리조차 불안한 사람들은 결혼을 포기했고, 출산을 거부했다. 일자리가 없는한 미래는 있어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고, 일자리가 없는한 바늘끝 만큼이라도 행복한 삶을 꿈꾸어 볼 수 없었다. 오직 일자리를 통해 얻은 돈, 그것만이 행복으로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출구였다. 그 때 우리는 돈이라는 자본주의의 그림자에 짓눌려 아파했다.




일자리를 가진 어른들은 그 일자리를 지키려고 싸웠고, 대물림하려고 발버둥쳤다. 빈부 격차는 점점 그 골이 깊어졌고, 갑자기 늘어난 수명 앞에서 우리는 방황하거나 비참한 일자리 경쟁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 우리는 소중한 삶을 위해 일을 사랑했던 게 아니었다. 오직 먹고살기 위해, 느닷없이 닥쳐온 긴 노후를 위해 일자리에 매달렸다. 그런 부끄러움을 지금 내 앞에 있는 인조인류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시청이 있던 건물이며 고궁이며 북적대던 시장을 찾아가도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이 지켜내려 안간힘을 쓰던 일자리를 두고 모두 어디로 갔을까. 놀라운 것은 사람들이 사라졌다고 세상이 크게 달라진 게 없다는 점이다. 그때의 그 거리며 집이며 나무들 모두 그대로 있다. 서로 경쟁하느라 타인을 속이고, 부를 축적하던 사람들과는 다르게 인조인류는 여유있고 선하다.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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