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비 온 뒤 세상

권영상 2016. 5. 12. 17:45

비 온 뒤 세상

권영상

 

   


온종일 비 오더니 자고나니 비 그쳤다. 창을 열고 바깥을 내다본다. 세상이 확 바뀌었다. 도무지 어제 같지 않다꼭 낯선 남의 나라에 와 낯선 남의 나라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듯 하다



먼데 산이 코앞에 다가온 듯 가깝다. 풍경 속 마을이며 나무이며 구름이며 하늘이 손에 잡힐 듯이 바짝 다가와 있다. 앞산 풍경도 그렇다. 어제까지만 해도 뭔가 엉키고 설킨 머릿속 같이 혼란스러웠는데, 지금은 빗질을 한 것처럼 가지런하다. 산의 속살이 훤히 들여다보일 만큼 세세하다. 어디 실뱀이라도 한 마리 기어가는 게 보일만큼 환하다.




이렇게 가까운 풍경인데, 이렇게 설레는 풍경인데 평소엔 남남처럼 거리를 멀리 두고 살았다. 앞산에서 울려나오는 휘파람새 소리가 투명하고 정갈하다. 어쩌면 저렇게 맑고 통통하고 매끄럽고, 윤기 있는지, 귀를 닫고 사는 사람조차 성큼성큼 바깥으로 걸어 나와 귀를 열 것 같다.

휘파람새 소리가 비 끝의 파란 공기를 흔든다. 파란 공기가 춤춘다. 저 휘파람새 소리 좀 들어보렴! 나는 풀섶 그늘에 숨은 달팽이들에게 말한다. 산 밑 농가의 파란 지붕 빛이 유난히 눈을 쏜다. 보리가 크는 남도의 여행지에서 보던 풍경처럼 신선하다.




벌 한 마리가 내 앞에 날아내린다. 덩치가 이만저만한 게 아니다. 말벌보다 더 큰, 살이 잘 오른 말벌이다. 그러고 보니 작약이 폈다. 세 송이. 어제까지 몽우리가 터질 듯이 팽팽하더니 참지 못하고 끝내 터졌다. 말벌은 꽃이 핀 작약에 앉은 게 아니라 이제 주먹만치 부풀어오른 꽃몽우리에 앉았다. 이놈의 말벌이 꽃몽우리를 데리고 놀 줄 안다. 긴 몸뚱이로 감싸듯 껴안고는 꽃몽우리를 핥는다. 꽃몽우리에 달짝지근한 꿀이 묻어있는 모양이다. 이리 안아보고 저리 안아보고 또 거꾸로 안아 보더니 급기야 밑을 더듬는다. 하루 동안 내리던 비에 굶주렸는지 음란하다.




비가 끝나면 끝이 아니다. 어제와 다르게 세상이 새롭게 시작된다. 어제까지 꽃에 집중했다면 오늘은 열매 맺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늘 구중중한 일상이 진력나도록 반복될 때, 그때를 위해 하늘은 하루 종일 비를 내린다. 그리고는 화면이 확 바뀐 영화처럼 새롭고 낯선 세상을 턱 보여준다. 만약에 그런 기적이 없다면 우리는 매일 새롭기 위해 여행 가방을 싸들고 낯선 이국의 풍경을 찾아 떠나야 한다.




이런 날 출근이라면 차를 두고 걸어 출근하겠다. 자전거가 있다면 자전거를 타고 한강을 건너 만리동 언덕에 있는 학교로 가겠다. 가다가 책가방을 멘 아이를 만나면 대뜸 타렴! 하고 자전거 뒤에 태워 학교 교문 앞까지 실어주겠다.

퇴근 때 오이도에 가 서해바다 보고 가지 않을래?”

산뜻한 오늘 같은 날, 퇴근길엔 서해바다에 놓여있는 섬 하나를 보고 가겠다.



집에 돌아올 땐 집 앞 상가에 들러 좀 비싸긴 하지만 꽃 한 다발을 사 아내의 품에 안기겠다. 아내는 뭣 하러 이런 비싼 꽃

을 샀느냐며 핀잔을 주겠지만 속으론 좋아할 테다. 비 온 뒤 세상이 확 바뀌었다. 구중중하던 나의 일상도 오늘은 확 바뀌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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