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꽃들도 아프다

권영상 2015. 9. 2. 15:55

꽃들도 아프다

권영상

 

 

 

 

 

텃밭에 나팔꽃이 있다. 텃밭이 집과 붙어있어 처마에 줄을 매고 올렸다. 지난해엔 꽃가게에서 산 보랏빛 나팔꽃이었다. 꽃은 아침마다 화려하게 피었다. 꽃을 놓칠까봐 때로는 일부러 일찍 일어나곤 했는데, 올봄엔 그 꽃이 바람처럼 싹 사라졌다.

꽃씨나 받아둘 걸 하고 후회했는데 그 빈 자리에 작고 파란 나팔꽃이 나타났다. 나는 매어놓은 줄에 그들을 올려주었다. 지난해의 나팔꽃과 달리 어리숙해 보였지만 꽃은 예쁘다. 앙증맞다. 연파랑의 오목하고 또렷한 앳된 꽃이다. 내 마음은 다시 요 작은 꽃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나는 또 아침이면 나팔꽃을 보러 쪼르르 텃밭에 나갔다. 모르기는 해도 나팔꽃도 내가 올 때를 기다렸을 거다.

그런데 오늘은 오전 일이 바빴다. 창문조차 열지 못할 만큼 일이 많아 그만 오전을 훌쩍 넘기고 말았다. 그래도 쉴 겸 텃밭에 나갔다. 이미 나팔꽃은 다 지고 없었다. 오므린 거라도 좀 보려 했지만 덩굴만 무성할 뿐 흔적도 없이 다 사라졌다. 서운했다. 서운한 건 나만이 아닐테다. 나를 만나보지 못하고 떠나간 나팔꽃도 서운했을 테다.

 

 

 

나팔꽃 그늘에 서서 나팔꽃을 생각한다.

무거운 삶을 가볍게 넘길 줄 아는 그 연파랑 빛깔이며 단순하기 그지없는 외형 때문에 나는 그를 좋아했다. 그를 생각하면 산뜻한 향수를 풍기며 도회의 플라타너스 가로수길을 걷는 소녀가 떠올랐다. 길을 걷다가 커피를 마시거나, 때로 보오보오 휘파람을 불거나, 웃옷의 단추를 하나 풀어내거나, 가까운 친구를 향해 문자를 날리거나....... 어쩌면 나는 그런 이미지 때문에 나팔꽃을 사랑했는지 모른다. 아침마다 빛나게 피는 꽃이니 나는 그의 인생도 빛나는 줄로만 여겼다. 그런데 그런 나팔꽃에게도 아픔이 있다. 오후를 모른다는 점이다.

 

 

 

 

나팔꽃은 정오의 해가 얼마나 뜨겁고, 때로는 추적추적 비 내리는 여름날 오후가 일상을 얼마나 울적하게 만드는지 모른다. 저녁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일몰의 풍경을 모르고, 일에 지친 사람들의 후즐근한 모습으로 귀가하는 발길을 모른다. 전등불 아래에 모여 저녁밥을 먹느라 부딪히는 수저소리를 모르고, 별을 바라보는 군상들의 슬픈 눈빛을 모른다는 것.

오후의 삶이 오전과 달리 고단한 듯한 하지만 그것들이 서로 어우러져 하루를 완성해내는 것이라면 오후를 모른다는 건 아픈 일이다. 나도 한 때는 고단한 오후가 아니라 달콤하고 스위트한 내 인생의 오전만을 바랐다. 무겁기보다는 가벼운, 구차하기보다는 안락한, 배고프기보다는 넉넉한, 그늘보다는 볕 드는 쪽만이 내게 찾아오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것을 거부한 꽃이 있다. 분꽃이다. 분꽃은 고단한 일터에서 돌아오는 이들의 오후를 추슬러주기 위해 늦은 저녁에 핀다. 그림자를 앞세우고 골목길을 걸어 귀가하는 이들의 저녁을 축복하는 꽃이다. 노동하는 이들의 늦은 오후를 연민하는 꽃이다. 분꽃은 한낮의 밝은 빛이 아니라 깜깜한 어둠을 지향한다. 어둠 속에서도 삶의 목표를 잃지 않는 향기나는 꽃이 그다. 그러나 그것이 또 빛의 원천인 한낮을 모르는  분꽃의 숙명적 아픔임을.

 

 

 

꽃들이라고 왜 아픔이 없고 고단함이 없겠는가. 삶의 오후를 모르고 져간 이 땅의 수많은 나팔꽃들을 생각하면서 또한 빛을 모르고 져간 이 땅의 어두운 분꽃들을 생각한다. 인생의 역사가 늘 오후에 있었다고 한다면 나팔꽃의 삶은 헛되고 헛되다. 그러나 오전이 없는 오후가 어디 있을까. 살아있는 것들에겐 그것이 비록 꽃일망정 아픔이 있다. 숙명적이든 숙명적이 아니든 아픔 앞에서 떨 필요는 없다. 그의 운명을 산뜻하게 받아들이는 나팔꽃처럼 오직 빛나게 피면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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