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떨어져 사는 근심
권영상
오후 4시쯤, 순무씨앗을 다 뿌리고 손을 털고 일어날 때다. 때 맞추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경기남부 지역은 내일 오전쯤 비가 온다고 해 일부러 오늘 파종을 했는데 벌써 비다. 어떻든 비여서 다행한 일이었다. 농기구를 정리하고 땀에 젖은 몸을 씻고 나오니 빗줄기가 제법 거세어졌다.
날이 어두워지고, 구름 속에서 천둥이 둥둥거렸다. 집을 떠나와 그런지 오후의 비 때문인지 괜히 서울집이 걱정이다. 북한이 연천군 야산에다 포를 날렸다는 속보가 인터넷에 떴다. 식구를 두고 혼자 안성에 내려와 있으려니 이것저것 근심이 많아진다. 대북 확성기를 조준 사격하겠다고 떠들던 그들이 결국 일을 내는 모양이었다.
길 건너 고추밭에서 일하시던 파란 지붕집 할머니도 비를 피해 들어가셨고, 아까까지 차를 고치느라 뚝딱거리던 옆집 양형의 쟁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빗소리만 내 머릿속 걱정거리처럼 요란하게 대지를 두드린다. 창가에 서서 근심스러이 바깥을 내다본다. 고추밭을 건너가는 전깃줄에 산비둘기 한 마리가 앉아 비를 맞는다. 적잖게 내리는 비인데 가까운 산을 두고 홀로 위태로운 전깃줄에 앉아 비를 맞는다. 뿌연 하늘을 배경으로 고즈넉이 앉아 있다. 모두들 비를 피해 떠나간 들에 저렇게 혼자 비를 맞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나는 비가 들이치는 창문을 닫고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종편 방송사들이 물을 만난 고기떼들처럼 소동을 치나 보다. 여기저기 동영상들이 떠올랐다. 포탄이 떨어진 그쪽 분과의 전화 연결 방송이 나왔다. 5시쯤 폿소리가 나기에 바깥을 나가보니 북으로 날아가는 수 십 발의 포 소리가 들리더란다. 속보 진행자의 말에 의하면 오후 3시 52분 경, 북에서 로켓탄이 날아와 마을에서 한참 떨어진 숲에 떨어졌고, 우리 군은 원점을 파악한 5시 4분경에 원점을 향해 스무 발의 155밀리 포를 쏘았다는 거다. 그 후엔 아무 일이 없기는 하지만 대피소에 대피한 이들 모두 불안한 마음이란다.
순무 씨앗 파종을 다음 주로 미루고 오늘 아침에 올라갈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들었다. 가벼운 일이긴 하지만 오늘은 아내가 마취를 하고 임플란트를 하는 날이다. 함께 치과에 갈 일이 아니라 했지만 그래도 병원까지 가 주어야하는 건데, 하는 마음이 인다. 보통 때라면야 함께 가 달라 해도 그만한 일에 무슨 병원이냐고 했을 일이지만 오늘은 또 그게 아니다. 심란하다.
우리 대통령이 중국의 70주년 전승기념일에 참석한다는 소식이 오늘 있었다. 가까이 사는 북의 젊은 지도자는 거기 참석할 주변이 못 될 터이니, 그에겐 그것도 분한 노릇일 테다. 이래저래 고립된 그가 무슨 일을 더 저지를 지 알 수 없다.
나는 딸아이에게 일찍 집에 들어가라는 문자를 보냈다. 예전 남북전쟁이 있던 날,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느라 땀을 흘리는데 ‘전쟁이 터졌다’는 마을 어른의 말에 놀라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왔다는 당시 분들의 말이 떠오른다. 가당찮은 일이지만 불길한 생각의 촉이 머리를 들쑤신다.
비는 그치지 않는다. 다시 일어나 창밖을 내다본다. 산비둘기는 아직도 전깃줄 위에 그대로 앉아 비를 맞고 있다. 그도 나를 보았는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이내 눈길을 가져간다. 산비둘기도 나처럼 무슨 근심 걱정이 많은 듯하다.
그쯤에서 아내한테서 전화가 왔다.
“휴전선에서 뭔 일이 났나봐!”
오히려 아내 목소리가 나보다 담담했다. 치과에서 이제 집으로 돌아온 모양이다. 나를 안심시키려고 그러는지, 아니면 실제 서울 정서가 그렇게 담담한 건지.......
“내일 전국적으로 비 온다니 고속도로 조심해. 밤에 전화하고.”
아내가 전화를 끊었다.
뒤숭숭하던 마음이 좀 놓인다.
가족을 두고 혼자 멀리 떠나와 있어 그런지 더욱 심란하다.
내 통화소리를 듣고 날아갔는지, 다시 내다보니 전깃줄에 앉았던 비둘기가 보이지 않는다. 내 머릿속 근심걱정도 한 가지 두 가지 비둘기처럼 날아가 버려주었으면 싶다.
내일은 아침 일찍 서울로 올라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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