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을 향해 날아가는 나비
권영상
아침마다 일찍 텃밭에 나간다.
거기 심어놓은 배추 십여 포기가 있기 때문이다. 농가의 대단위 배추농사와 달리 이 무렵에 꼭 해야 할 나의 일이 있다. 배추벌레를 잡아주는 일이다. 하루 이틀 게으름을 피우거나, 볼일 때문에 대엿새쯤 집을 비웠다가 돌아와 보면 배추가 거지반 벌레에 갉아 먹히고 만다. 그럴 때의 배추벌레는 초록물 덩어리다. 터질 듯이 퉁퉁하고 크다. 크기만 한 게 아니라 징그럽고 무섭기까지 하다. 어린 시절 내가 알던 배추벌레와 전혀 덩치가 다르다. 그놈이 꾀기 시작하면 아예 배추밭과 결별하는 게 낫다.
올해 봄, 양배추 두 이랑을 가꾸어본 적이 있다. 무어든지 다 처음이지만 양배추는 너무나 낯선 작물이었다. 그런 까닭에 나는 저녁마다 물조리개 가득 물을 받아 그들을 공경했다. 역시 공을 들이는 만큼 양배추는 잘 자랐다. 그런데 신기한 일은 꽃도 없는 양배추 이랑에서 나비들이 늘상 날아오른다는 거였다. 그건 앞뒤가 맞지 않는 일종의 모순의 풍경이었다. 그러기에 더욱 놀랍고 경이로웠다. 나비는 좀은 서툰 날갯짓으로 팔랑팔랑 날아서는 어디론가 가버리곤 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들은 우리 텃밭의 양배추 잎을 먹고 갓 우화한 나비들이었다. 양배추 잎에 낳아놓은 연둣빛 나비 알을 알 턱이 없었다. 나비애벌레들은 내가 모르는 사이 텃밭을 터전으로 마음껏 자랐다. 나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양배추 잎을 헤쳐 그 속을 골똘히 들여다봤다. 양배추는 겉잎만 멀쩡했지 속잎은 애벌레들 이빨에 다 갉혀있었다. 갉아도 갉아도 보통 갉아먹은 게 아니었다. 성한 자리가 없었다.
슬그머니 화가 났다. 나비들에게 꼭 속은 느낌이었다. 나는 장갑을 끼고 밭에 들어가 기를 쓰며 나비애벌레들을 잡았다. 그러다가 며칠 서울을 다녀온 뒤였다. 내려와 보니 양배추 밭이 아예 폭격을 맞은 듯 황폐해져 있었다.
결국 나는 나비들에게 지고 말았다. 졌다고 화만 낼 것이 아니라 패자답게 마음도 바꾸었다. 그깟 양배추 한 잎 먹겠다고 아침마다 양배추 골에 엎디어 벌레와 싸우는 일이라는 게 사내답지 못했다. 80킬로그램의 내가 1그램도 안 되는 애벌레와 실랑이질하는 일은 사내의 도리가 아니었다. 오래 오래 잘 살아보자고 욕심을 부리지만 나에 비해 나비는 고작 며칠을 산다. 며칠을 사는 나비에겐 소중한 꿈이 있다. 꽃가루를 기다리는 들판의 들꽃을 위해 수분을 해야 할 임무가 있다. 만약에 나비가 없다면 들판은 얼마나 삭막하겠는가.
나는 내 안의 욕심을 버렸다.
더 이상 나비애벌레를 잡는 대신 양배추들을 욕심 없이 바라보기로 했다. 그렇게 욕심을 내려놓으니 양배추 밭이 마치 남의 밭인 양 마음 편하게 보였다. 팔랑팔랑 나비가 날아오르면 나는 나비의 궤적을 살폈다. 고추밭 이랑을 넘어, 마당을 건너 나비는 들판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 쪽으론 참깨 꽃이 피는 참깨 밭이 있고, 그 너머엔 한창 들꽃을 피우는 들판이 있다.
나비는 태어나 아직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그 들판을 향해 꽃을 찾아 날아간다. 정말로 경이로운 순간이 아닐 수 없다. 1그램도 안 되는 몸에 탐험자의 용기가 있다. 떠나가 제가 살던 곳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아무 기약도 없는 길을 가고 있다. 그 길엔 그가 감당하기 어려운 숱한 고비가 있을 테지만 나비는 날개의 힘을 믿고, 먼 길을 떠난다.
생각해 보면 연약하기 그지없는 것이 나비다. 그 나비가 먼 들판에 핀 꽃을 찾아 바람이 불어오는 길을 간다는 게 신비롭기만 했다. 그때 나는 나비에게 보기좋게 참패를 당했다. 하지만 더 좋은 것을 얻었다. 나비가 내게 보여주는 놀라운 탐험자의 용기다.
'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가위 추석 잘 쇠세요. (0) | 2015.09.25 |
---|---|
한가위 추석을 앞에 놓고 (0) | 2015.09.22 |
숲속의 희생자들 (0) | 2015.09.04 |
꽃들도 아프다 (0) | 2015.09.02 |
얘가 왜 이러는지 정말 모르겠다 (0) | 2015.08.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