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숲속의 희생자들

권영상 2015. 9. 4. 12:51

숲속의 희생자들

권영상

 

 

 

 

 

산속으로 여름이 지나간 흔적이 뚜렷하다. 몰라보게 산이 깊어졌다. 길옆 나무숲이 우거져 산길이 부쩍 좁아졌다. 나무들의 키가 한층 높아졌다. 여름이 지나가는 동안 숲은 쉬지 않고 성장했다. 요사이는 하루가 멀다 하고 비가 내린다.

 

 

 

소나무숲 길을 타고 내려오다가 길을 바꾸어 잡목 숲을 지날 때다. 느티나무 하나가 길게 쓰러져 있다. 부러진 게 아니다. 밑둥이를 땅에 박은 채 제 몸의 무게를 못 이겨 활처럼 구부러져 있다. 엊그제 이 길을 걸어오며 본 나무다. 그때는 그냥 나무가 쓰러졌구나, 했다. 근데 오늘은 그 나무 곁을 지나다가 멈추어 섰다. 나라도 좀 봐주어야할 것 같았다. 숲에서 여러 해를 살다가 쓰러졌는데 모르는 척 하고 싹 지나가기가 미안했다.

 

 

 

쓰러진 나무는 길옆 우묵한 비탈이 그의 자리다. 뽑히지 않아 다행스럽긴 해도 이제 다시 일어서기는 어려운 상태다. 나무줄기를 보니 쓰러질 만도 하다. 10여 미터 키에 비해 가늘고 허약하다. 하루가 다르게 숲이 성장하니 몸을 튼튼하게 키울 여유가 없었을 테다. 급한 것이 이웃나무들과의 경쟁이다. 그러니 기반을 다진다며 여유를 부렸다간 햇빛 한줌 받아낼 하늘마저 잃고 말 것이다.

 

 

 

나는 느티나무가 서 있었을 하늘을 쳐다봤다. 빈자리 하나 없이 숲으로 가득 들어찼다. 그러고 보니 쓰러진 나무에겐 이렇다 할 가지 하나 없다. 그저 몇 가닥의 어설픈 가지와 그 끝에 붙은 몇 조각 나뭇잎이 전부다. 햇빛을 받아 먹고사는 나무에게 있어 이런 모습은 극빈 그 자체다. 나무라면 우듬지가 햇빛을 향해 쭉 벋어 있어야 하는데, 고사리손마냥 아래로 꼬부라져 있다. 나무는 이웃나무들과 햇빛 경쟁을 하느라 했지만 이렇다 하게 얻은 것 하나 없이 키만 키우다가 쓰러진 셈이다.

 

 

 

 

숲이란 무자비하다.

햇빛을 고루 받기 위해 이웃나무에게 하늘 한 조각을 떼어 나누어 주거나 양보하는 일이란 없다. 비탈에 선 느티나무를 위해 누가 그의 등받이가 되어주거나 디딤돌이 되어주거나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려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힘없는 이웃을 내가 도약하는 희생양으로 삼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가 아는 숲엔 강하고, 지극히 이기주의적인 나무만이 살아남는다. 독립수로 들판에 서 있는 나무라면 모르지만 적어도 숲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나무들에겐 오직 치열한 적자생존만 있다.

 

 

 

 

활처럼 길게 쓰러져 누운 나무의 잔등을 어루만져 본다. 키는 자랐으나 발육 상태가 안 좋은 가느다란 육신이다. 배불리 먹어보지 못한, 감미로운 미풍 한번 즐겨보지 못한, 햇빛의 따스한 손길 한번 느껴보지 못한, 그저 살아남기에 바빠 허둥대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런 나무가 어떻게 삶을 사유하고, 원대한 꿈을 꾸고, 남을 사랑할 마음을 가질 수 있었겠는가. 또 어떻게 새들이 지어내는 음악을 마음 놓고 즐길 수나 있었겠는가.

 

 

 

 

나무는 숲에 살면서 숲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을 제대로 누려보지 못했다. 그것은 저 뼈만 앙상한 몸을 보면 안다. 하늘이 가없이 자비롭다는 것도, 양보와 나눔의 미덕이 숭고하다는 것도, 산다는 것이 그래도 행복이란 것도 미처 겪어보기 전에 쓰러졌다.

나는 휴대폰 카메라로 두 컷의 사진을 찍었다. 그것이 쓰러진 나무에게 무슨 위안이 될까마는 그래도 그건 아니었다. 햇빛을 함뿍 받으며 자란 정원의 장미꽃은 찍으면서 정작 햇빛 한줌 못 받다가 쓰러진 느티나무를 찍지 않는다는 건 부도덕의 소치다. 그건 리얼리즘을 지향하는 카메라에 대한 모욕이기도 하다.

 

 

 

 

숲속의 나무들은 누군가에 의해 늘 희생당한다. 폭풍이나 폭설, 오랜 장맛비와 같은 외부의 힘에 의해 쓰러지기도 하지만 숲 내부의 치열한 경쟁에 의해 희생되기도 한다. 이것이 자살로 목숨을 버리는, 지금 우리의 세상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들 모두 사람으로서 누려야할 것들을 빼앗긴 경쟁의 희생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