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빛을 살려내는 부엉이등불

권영상 2015. 7. 31. 15:54

빛을 살려내는 부엉이등불

권영상

 

 

 

분청을 입힌 부엉이등불이 하나 생겼다. 며칠 전 모 문학지에서 <작가와의 만남> 인터뷰를 했었는데 그때 송시인으로부터 받은 선물이다. 눈 둘레엔 불빛이 새어나가도록 만든 수레바퀴 모양의 구멍이 있고, 몸통엔 깃털 문양의 촘촘히 구멍을 낸, 두 귀가 쫑긋 선 부엉이등이다. 그냥 놓아두고 보기만 해도 예쁘다.

식탁 위에 놓인 부엉이등에 불을 켜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걸 켜보자고 집안 불을 끌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일몰 근처에서 방에 불을 켜면 자정이 가까울 때까지 불을 끄는 일이란 여태 없었다. 바깥 볼일이 있어 불을 끄고 집을 나서는 경우는 있어도 멀쩡한 집에 불을 끄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밤이 너무 더웠다. 전등불이 전열기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내 손은 자연스럽게 부엉이등불 쪽으로 갔다. 송시인이 놓고 간 접시초를 꺼내 심지에 불을 붙여 등 안에 들이밀었다. 그리고는 일어나 딸깍 거실과 방의 불을 껐다.

그 한 순간이다. 세상이 훅 바뀌었다.

뜻밖에도 깜깜하던 창문 밖 세상이 환하게 살아났다. 마당에 선 해바라기며 배롱나무, 건너편 고추밭 너머의 참나무 숲이 우련하게 살아났다. 방안에 전등불을 켜면 언제나 집 바깥세상의 풍경이 방밖으로 밀려나 캄캄했는데 이제 그 정반대가 되었다. 바깥 풍경이 살아나 방안으로 천천히 들어서고 있었다.

 

 

 

그뿐만인가. 풀벌레 소리가 찾아들어왔다. 여태껏 가을이 되어야 풀벌레 노래를 들을 수 있을 거라며 아예 귀를 닫고 살았는데 그게 아니다. 그들은 이미 밤의 대지에 와 있었다. 뜨르르 뜨르르 밤의 옷자락에 고운 소리무늬를 수놓고 있었다.

이 무렵의 시간이 밤 8시 반쯤. 오후부터 마당에서 뭘 고치고 있던 뒷집 사람들이 아직도 그 일을 못 마쳤는지, 두런거리는 소리가 뒷문을 타고 정겹게 들려온다. 먼데서 울리는 자동차 소리, 아랫동네에서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 건너편 산에서 우는 소쩍새 소리……. 전등불을 켜고 앉아서는 도저히 못 듣던 소리와 빛이 살아났다.

 

 

 

요 조그마한 부엉이등불 하나가 내 시야와 청각 밖에서 머뭇거리던 빛과 소리를 살려내고 있었다. 환한 전등불빛에 포획된 채 존재감마저 상실하고 있던 늘 그 자리의 냉장고, 식탁, 의자, 전등, 옷장……. 그들이 우련한 불빛으로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부엉이등불은 문명에 익숙해진 백색 빛이 아닌, 문명 저 너머의 흐릿하면서도 안온한, 자신의 빛을 낮춤으로서 세상의 사물을 은은히 살려내는 빛이다.

 

 

 

방바닥에 드러누웠다.

부엉이등에서 번져나간 불빛이 벽과 천장에 수많은 깃털 모양으로 얼룩진다. 내가 지금 부엉이 몸통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다. 아니, 이파랑이가 많은 큰 수목 아래에 누워있는 기분이기도 했다. 다락방 처마에서 풍경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수목의 그림자도 바람을 따라 일렁일렁 움직이기 시작한다. 내가 깔고 누운 집 한 채가 둥실둥실 그림자 춤을 추듯 신비롭다.

참 얼마만인가. 얼마나 오랫동안 문명의 빛을 따라 허덕이며 사느라 이 원시의 불을 잊었던가. 이 불빛 아래에서 어머니는 바느질을 하셨고, 우리는 책을 읽었다. 읍내에서 밤길을 밟아 돌아오시는 어머니를 바래러 가던 그 등불이 여기 내 앞에 있다.

 

 

 

전등을 켜고 앉았으면 지금쯤 나는 낮에 딴 맏물고추를 닦고 있든가, 내일 아침에 먹을 국을 끓이든가, 텔레비전을 켜든가, 글을 쓰든가 무슨 일을 해도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불을 끄고 부엉이등불을 켜놓고 있는 동안 나는 손을 놓았다. 일 대신 내가 여태껏 등한히 하던 세상을 만났다. 닫혀있던 내 몸의 감각을 살려 잠시 문명 그 너머의 추억 속을 여행했다.

내게 부엉이등불을 주고 간 송시인이 고맙고, 그걸 켤 줄 아는 내가 고맙기 그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