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차에도 영혼은 있는가

권영상 2015. 7. 28. 21:52

차에도 영혼은 있는가

권영상

 

 

그 차가 가끔 꿈에 나온다. 아내가 몰던 소형 승용차 프라이드다. 21년을 동행하던 어느 날 아내는 곰곰 생각 끝에 차를 처분했다. 그러고 4년이나 지났는데 차는 여전히 나를 찾아온다. 가끔은 꿈속에 나타나 ‘일 좀 그만하라’며 내게 충고한다. 한때 한솥밥을 먹던 식구나 다름없었다. 우리는 그 차를 보내고 오랫동안 그가 우리의 가슴에 남긴 빈자리를 느꼈다. 한낱 쇠붙이에 불과한 차에게도 영혼은 있는가.

 

 

 

프라이드가 우리 집에 온 건 아내의 출근길 때문이었다. 집에서 직장까지 교통편이 너무 나빴다. 설상가상 직장이 산중턱에 있었다. 승용차로 출퇴근할 형편이 못 되었지만 힘에 버거운 대로 아내는 차를 샀다. 출퇴근은 물론 시장을 보아오는 일이며, 특히 한 때 내 몸이 좀 불편했을 때 차는 나의 병원 출입을 도왔다. 아이가 자랄 때는 학원 다니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고, 명절이면 고향집을 다녀오느라 고속도로를 탔다. 아내가 몇 번인가의 직장을 옮길 때 차는 직장살림살이를 군소리없이 옮겨 날랐다.

 

 

 

우리와 함께 살아온 20여년. 프라이드는 우리의 든든한 신혼살림 노릇을 했다. 자식을 낳아 키우고, 변두리의 집에서 조금씩 직장이 가까운 쪽으로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옮겨오던 우리의 삶의 모습을 차는 고스란히 지켜보았다. 그렇게 20여년이 지나고 우리가 남들만큼 살게 될 무렵이었다.

“이제 차 좀 바꾸면 안 될까?”

남들처럼 번듯한 차를 가져야겠다는 세속적인 생각이 그 무렵 내 머릿속에서 움텄다. 중학생이 된 딸아이도 친구 엄마들이 모는 고급승용차를 부러워했다.

“창피하다구! 엄마 차에서 내릴 때면.”

그랬지만 정작 차에 대한 아내의 생각은 신념에 가까울 만큼 견고했다.

 

 

 

“엄마와 함께 20년을, 그러니까 이 차는 너보다 오랫동안을 가족처럼 살아왔어.”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그림을 그리는 아내는 물질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 출퇴근을 하는데 불편함만 없다면 남보란 듯 과분한 승용차를 모는 일을 오히려 부끄러워했다. 그러나 그런 아내의 생각과 달리 차는 시간이 흐를수록 고장이 잦았다. 문짝이 열리지 않았고, 속력이 느렸다. 무엇보다 떼려야 뗄 수 없는 깊은 의미가 손때처럼 덧씌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내의 프라이드도 더 어찌할 수 없는 수명에 이르러 처분할 상황에 놓이게 됐다. 그날 아침이었다. 아내의 차를 실어갈 견인차가 아파트로 들어왔다. 아내는 몇 번이고 마치 물건을 놓고 내린 사람처럼 차문을 열고 안을 기웃거렸다. 작별과 함께 드디어 견인차가 아내의 차를 끌고 정문을 나섰다. 나는 아내와 함께 정문 느티나무 아래에 서서 한길을 향해 사라져가는 프라이드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한참만에 돌아서는 아내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나도 그랬다. 마치 가족을 멀리 떠나보내듯 그렇게 서러웠다. 물질 숭상을 싫어하는 아내에게 있어 쇳덩어리에 불과한 프라이드는 무엇인가. 물질에도 사람 못지않은 영혼이 있다는 말인가. 지금도 프라이드는 내 꿈속에 들어와 나를 걱정한다. 일 좀 그만 하라고. 그게 프라이드의 영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