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마중>과의 비 오는 날의 ‘이바구’
권영상
간밤에 열대야가 있었습니다. 너무 더워 새벽 2시쯤 깨었습니다. 등이 뜨거워 잠을 이룰 수가 없었어요. 불을 켜고 책을 보다가, 거실에 나가 맨바닥에 등을 대고 누웠다가, 선풍기를 틀어 몸을 식혔다가 그렇게 둥실대다가 4시쯤 잠이 올 것 같아 눈을 붙였습니다.
그런데도 아침에 일찍 눈이 떠졌습니다.
오늘은 충주 먼데 있는 <동시마중>에서 찾아와 ‘대담’을 하기로 약속한 날입니다. 정오에 집에서 가까운 한택식물원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아내를 서울에 두고 혼자 내려와 있는 제가 점심상 차리는 걸 보여주기가 뭣해 식물원 음식점에서 밥을 먹고, 거기 적당한 곳에서 대담을 할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큰일입니다. 잔뜩 흐려있던 하늘이 심상치 않습니다. 쿠렁쿠렁 천둥이 울더니 급기야 비를 쏟아냅니다. 이렇게 대뜸 쏟아내는 비도 처음입니다. 비도 비도 보통 비가 아닙니다. 주먹질을 하듯 대지를 두들겨댑니다. 하늘이 점점 어두워집니다. 밤처럼 컴컴해집니다. 컴컴한 하늘에서 연실 천둥이 치고 번갯불이 번쩍입니다. 시골은 모두 숲이고 작물이고 풀이라 빗방울에 부딪히는 소리가 어마어마합니다. 바다의 풍랑이 유별나다지만 이만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온 마을이 떠나갈 듯 합니다.
엊그제까지도 한 주일 날씨예보엔 분명 오늘과 내일은 비가 없는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폭풍비가 쏟아지네요. 숨이 막힐 지경입니다. 천둥소리가 하늘벽을 허물듯이 요란스럽습니다. 건너편 하늘에는 쉴 사이 없이 번개의 섬뜩한 발자국이 찍혀나고 이윽고 구름덩어리와 덩어리가 맞부딪느라 터지는 굉음이 세상을 뒤덮습니다.
나는 <동시마중>의 이안 시인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오늘은 오시기 어려울 듯 합니다.”
이 쪽 날씨 상황을 다 듣고난 이안 시인이 대답했습니다.
“그래도 12시에 뵙겠습니다.”
그랬습니다. 어쩌면 그게 젊은이들과 나이 먹은 나의 차이가 아닐까 싶어 얼른 대답해주었습니다. 그러면 차 조심조심 몰고 오시라고.
그러고 전화를 끊었는데도 천둥과 번개는 여전하고, 세상을 다 휩쓸어갈 듯 비는 굵어졌습니다.
11시 20분,
나는 집 단속을 하고, 차에 올랐습니다. 한택식물원 가는 길에 보니 길을 휩쓸고간 비의 흔적과 길에 고인 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10분 뒤, 한택식물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어쩐지 나는 뭔가 하나를 놓고 내린 듯한 기분으로 차에서 내렸습니다. 우산입니다. 그러고 보니 세차게 내리던 비가 그 사이 뚝 그쳤습니다.
<동시마중> 팀들이 벌써 와 있었습니다. 이안씨, 장동이씨, 송선미씨, 김경진씨. 이안씨를 뺀 나머지분들은 처음 보는 이들이지만 금방 가까워졌습니다. 그분들도 동시를 쓰는 분들이고 가끔 글을 통해 뵈었던 이들이었습니다.
한택식물원 2층에서 점심을 먹고, 식물원을 돌아보고, 율곡리에 있는 집으로 왔습니다. 그때부터 이안씨는 자신이 준비해온 자료로 하나하나 내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시인과의 대화라면 뻔한 질문이 있지요. 시를 언제 적부터 썼느냐, 쓰게 된 동기는 무어냐? 그런 질문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여태까지 제가 쓴 17권의 동시들을 치밀하게 읽고 시가 변해간 궤적과 그 변모해간 이유와 결과물의 공과 허물을 캐물었습니다. 그러니까 내 시의 처음과 마지막을 다 정리해 가기로 작정을 하고 온, 이를 테면 나의 전기를 쓸 것처럼 꼼꼼히 따지고 캐내었습니다. 이안씨의 집요한 질문에 우리는 모두 지쳤습니다. 우리라면 사진을 찍으시는 장동이 시인, 기록을 하시는 김경진, 송선미 시인 모두.
2시간 대담 후, 10분을 쉬고, 다시 시작해 오후 5시에야 끝났습니다. 4시간 동안 질문과 대답이 있었습니다. 대충대충 형식적으로 지면이나 채우는 그런 대담은 분명 아니었습니다.
그 일을 힘겹게 마치자, 팟 캐스트에 올릴 거라며 제 동시 한편을 낭송해달래서 그 일도 했습니다.
옛날에 호랑이가 살았어
-옛날에 말이지, 호랑이가 살았어.
그 호랑이는 어찌나 힘이 세던지
황소도 잡아먹고 사람도 잡아먹었단다.
그 호랑이가 엄마를 보더니 뭐란 줄 아니?
느네 남편 주면 안 잡아먹지. 그러는 거야.
그래서 휙 주었지.
-그랬더니 엄마?
-그랬더니 이번엔 느네 아기 주면
안 잡아 먹지. 또 그러네.
-나를? 엄마, 나를?
-응. 그래서 좋다 하고 너를 휙 던져줬지.
-그랬더니?
-그랬더니 또 뭐랴냐믄 너도 잡아먹겠다 어흥!
그러며 엄마를 넝큼 잡아먹네.
-그래서 어떻게 됐어?
-그래서 우리가 여기 와 만났잖아.
_여기가 어딘데?
-여기가 거기지. 호랑이 뱃속.
주인 노릇도 못하고, 올해 내가 심고 키워가꾼 감자 한 봉지씩으로 입막음을 하고 그냥 그분들과 작별을 했습니다.
참 지독히 힘든 하루였습니다. 천둥 치고 번개 치고 장대비 내리듯한 하루였습니다. 그러면서 데크에 혼자 나와 커피를 마시며 흘러간 시간을 생각하노라니 내가 글을 쓰며 살아온 30여년을 깨끗하게 정리한 기분이었습니다.
멀리에서 와준 그 네 분이 새삼 고맙게 느껴졌습니다. 근데 가만 생각해 보니 그분들에게 커피를 대접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아침 식탁 메모지에 분명히 ‘수박과 커피, 또는 냉동실에 둔 삶은 옥수수 찌기’를 써놓았는데 옆집 아주머니께서 주신 복숭아만 먹여 보냈습니다. 그정도로 정신이 없었습니다.
나는 그분들이 내게 주시고간 부엉이등불과 제 동시 속 ‘꽝꽝나무’를 손수 수실로 새겨넣은 모빌만 받았습니다. 참 나이 먹은 값을 못했습니다.
6시경 문자가 왔습니다.
무사히 도착했다는.
문자를 받고 나니 나의 무례가 새삼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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