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통신매체가 탄생시킨 줄임말

권영상 2015. 8. 7. 21:42

통신매체가 탄생시킨 줄임말

권영상

 

 

 

 

 

저녁을 먹고 나자, 오후에 함께 사온 수박이 생각났다. 딸아이가 그걸 잘라내며 내게 질문 같지 않은 질문을 했다. 엄마를 100% 사랑하냐구. 가끔씩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본 딸아이의 속셈이 뭔지 몰라 나는 물론이지, 했다. 그러자 그럼 엄마는 어떻게 생각할까? 했다. 종종 싸우긴 하지만 엄마도 아빠를 100% 사랑할 거라고 믿어, 했다.

그러자 함께 있던 딸아이와 아내가 소리쳐 웃었다.

“아빠같은 사람 뭐라 하는 줄 알어? 근자감이라 해.”

“근자감?”

내가 되묻자 딸아이가 되받았다.

“근거없는 자신감이라고.”

그 말에 나도 웃고, 조롱하듯 아내도 웃었다.

 

 

 

“이렇게 웃을 때를 위해 만들어진 말이 있지. 핵잼! 핵폭탄 만큼 재미있다는 말. 온가족이 달게 웃는 이야기 상황은 꿀잼, 더 재미있으면 개꿀잼."

딸아이와 세대간 불통의 고통이 아니라, 재미에 이끌려 또? 또? 또를 재촉했다.

이런 언어들은 인터넷이나 SNS 등의 통신매체에 즐겨쓰이는 말로 젊은 세대들간에 주고받는 신조어들이다. 처음 들어보는 말이지만 귀에 쏙쏙 들어오고, 재미있다.

“여보, 금사빠 뭔 말인지 모르지?”

아내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금방 사랑에 빠지다.”

아내가 대답하며 또 물었다.

"그럼, 넘사벽은?"

나는 또 고개를 저었다.

"넘을 수 없는 사랑의 벽."

딸아이와 대화를 자주하는 아내의 입에서 그런 기막히게 반짝이는 말이 나왔다. 듣기만 해도 신선하고 맛깔스런 말이다.

 

 

 

인터넷을 뒤졌다.

‘깜놀’이니 ‘지못미’, ‘귀차니’, ‘컴터’등은 알았지만 그것만 해도 이미 한물 간 유행어였다. 통신매체어에 대한 어른들의 반응은 한결같이 그런 말이 우리 말을 파괴하느니, 세대간 소통을 어렵게 하느니, 언어의식이 정밀해지지 못하느니 하는 ‘늙은 소리’들이다.  

그러나 이런 줄임말들은 아주 오래전에도 쓰였다. 대표적인 것이 ‘한국’이다. 대한민국을 달리 말하는 줄여쓰는 말이다. 도로공사를 ‘도공’이라하고, 석탄공사를 ‘석공’, 민간상업방송을 ‘민방’, 가장 대중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말이 '노사모'다.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우생순’. 그뿐인가 이미 세대를 불문하고 통용된 줄임말도 있다. ‘386세대’다. ‘슈퍼’니 ‘3포세대’란 말도 버젓이 따옴표없이 신문지면에 오르내린다. 6,70대 노인들도 자신들의 친구를 일컬어 ‘남친’이니 ‘여친’이니 하는 세상이다.

 

 

이미 우리 시대의 언어는 인터넷과 휴대폰 등의 통신매체 등장과 함께 젊은 세대들이 주도해가고 있다. 언어가 다양한 방식으로 활발하게 합성되고, 비틀리고, 구부려진다는 건 젊은 세대들의 문화가 그만큼 다양해지고 있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통신매체 줄임말은 날로 증가하고 있는데 이런 줄임말에 대한 제대로된 글조차 하나 없다는게 전직 국어교사로서 아쉬울 뿐이다.

 

 

 

 

1. 어절 단위의 줄임말

 

 

 

일정하진 않지만 각 어절의 첫음절을 딴 고전적인 줄임말이 있다. 생선(생일 선물), 급카(급식 카드), 교카(교통 카드), 평친(평생 친구), 점약(점심 약속), 김천(김밥 천국), 신컨(신이 내린 컨디션), 심쿵(심장이 쿵하다, 두근두근), 먹튀(먹고 튀다), 놀토(노는 토요일), 걸조(걸어다니는 조각미남), 솔까말(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금사빠, 넘사벽, 깜놀(깜짝 놀라다)........

그 외에도 재미있는 어절 단위 줄임말이 있다. 그알(그래, 알았어), 오그(오, 그랬구나), 아그(아, 그렇구나)

이런 말은 한번 들으면 금방 알 수 있는 말로 젊은 세대들의 창조적 언어감각을 엿볼 수 있다. ‘심쿵’은 ‘마음이 두근거리다’로 ‘마두’라고도 쓸만한데 한자어 ‘심’과 ‘쿵’하는 부사어를 결합시킨, 의미를 한 차례 에둘러내는 재치가 묻어있다. ‘그알’, ‘오그’, ‘아그’등의 말에선 말 듣는 이의 공감하고픈 심정이 2음절 속에 고스란히 배어 있다.

 

 

 

 

 

2. 음절을 줄이거나 아예 지어내는 말

 

 

 

 

어절의 첫음절을 모아쓰는 정도로 만족하지 못하는 경우들이다. 이 경우엔 기존의 낱말을 부수거나 전혀 다르게 표기한다.

친구를 ‘튄구’로, 우리를 ‘울히’로 적는다. 이 조어를 쓰는 이들은 연령이 낮거나, 서로 절친한 꼬마 또래임을 알 수 있다. ‘초딩’이니 ‘중딩’, ‘고딩’, ‘얼짱’, ‘뽀샵’ ‘귀차니즘’, ‘당근이지’, ‘담탱이’, ‘곶감’(곧 감) 등은 두 음절이나 두 낱말을 합칠 때 그중 한 음절의 소리를 부수거나 다르게 표기하여 귀엽거나, 멋있거나, 당연하거나 아니면 누군가의 권위를 손상하려는 뉘앙스를 바탕에 깔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의미를 더 달콤하게 줄인 말도 있다. 대표적인 말이 ‘잼’이다. 우리민족이 선호하는 음절은 일반적으로 2음절, 3음절 한 단어인데 반해 ‘재미’는 1음절 ‘잼’으로 파괴했지만 ‘잼’이라는 소리 속엔 재미라는 본뜻을 남겨두었다. 이 ‘잼’이란 소리속엔 ‘재미’라는 의미와 ‘잼jam'이라는 두 개의 달콤한 의미가 겹쳐 있다. 이 말이 ‘꿀-’과 합성하면 2음절의 ‘꿀잼’, 강조를 나타내는 접두어 ‘개-’를 만나면 ‘너무너무 재미나다’는 뜻의 3음절 ‘개꿀잼’을 만든다. 영어 ‘no-’와 결합시켜 부정어 ‘노잼’을 만드는 재치도 놀랍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합성한 신조어로 ‘꿀팁’, ‘개꿀팁’이 있다. 젊은세대들의 뛰어난 조어력을 짐작할 수 있는 말들이다.이런 신조어는 어휘의 함량을 기름지게 한다는 측면에서 그 수명이 오래가지 않을까 한다.

 

 

 

 

3. 4자성어식 줄임말

 

 

 

 

4자성어식 줄임말은 한자의 4자성어처럼 그 본뜻을 금방 알아내기가 어렵다. 이를테면 ‘낄끼빠빠’, ‘안물안궁’, ‘복세편살’, ‘번달번줌’, ‘아사아작’ 등이다.

‘낄끼빠빠’는 낄 데는 끼고 빠질 데는 빠지라는 말이고, ‘복세편살’은 복잡한 세상 편하게 살자는 뜻이다. ‘아사아작’은 아프게 사랑하고 아프게 작별한다는 뜻.

역시 4자성어답다. 인생을 살아본 자의 지혜와 동시대인들의 금언적 성격이 내포되어 있다.

‘안물안궁’은 안 물어봐도 안 궁금해라는 뜻으로 관심을 갖지 말아달라는 말을 직설보다는 혼자 그 말의 뜻을 생각하게 하는 냉소적인 말이다. ‘번달번줌’은 번호를 달라면 번호를 준다는 말로 간편히 친구에게 조언하기 딱 좋은 말이다.

 

 

 

4. 외래어와 합성된 줄임말

 

 

 

 

순우리말의 통용량이 적을 때 우리 말은 한자어와 합성하여 더 적절하거나 아니면 전혀 의미가 다른 말로 성장했다. 인터넷 신조어도 마찬가지로 시대에 맞게 영어와 합성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실제 많이 쓰고 있는 ‘쿡방’이란 말이 있다. ‘요리하는 방송 프로그램’을 이르는 말이다. 우리 말 '방송'이 cook이라는 외래어와 결합했다. 그런 말로 ‘신컨’(신이 내린 컨디션), ‘선플’, ‘악플’ 같이 흔히 쓰이는 말이 있거나 ‘올당’(모두 당선)이니, 추베(추천 베스트), 일웹(일본 웹사이트에서 일본 팬이 그린 그림), 비공드(비공개 스크랩), 보작(보너스 작품), 눈팅(댓글은 달지않고 눈으로 보기만 하다) 등이 있다.

 

 

 

 

이외에도 '담배'와 같이 두 음절의 첫소리를 알파벳으로 차용해 표기한 ‘DB'가 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놀라운 광경을 보고 감탄하는 ‘OME!'가 있다. 연인끼리 주고받는 귓속말을 ‘꽁냥꽁냥’이라는 의태첩어로 만들어내는 조어력도 눈여겨 볼만하다. 어떻든 이 모두 자신 앞에 부딪힌 언어상황을 이런 저런 방식으로 표현해 보고자하는 젊은이들의 창조욕구의 한 측면이 아닐까 한다.

 

 

 

 

통신매체는 끝없이 발달해갈 것이며, 그에 따른 매체언어들도 쉬지 않고 진화해갈 것은 뻔하다. 언어란, 그 말을 쓰는 말 무리들의 맨 앞에서 새로운 문명과 부딪히는 젊은 세대에 의해 생성되고, 성장하고, 또 때로는 유통기한의 만료와 함께 사멸하기도 한다.

통신매체에 의해 만들어진 언어변화를 두려워하는 이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어왔다. 그들은 전통을 지킨다는 명분 아래 새로운 문명과 접촉하는 이들의 은어, 유행어들의 신조어를 경계했다. 그러나 언어가 다양하게 요동친다는 말은 젊은 문화가 다양하게 요동치고 있다는 뜻이다. 한 나라의 말은 그런 문화폭풍 속에서 폭풍과 함께 요동치면서 더욱 다양하게 살아남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