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나도 피서를 간다

권영상 2015. 8. 8. 21:46

나도 피서를 간다

권영상

 

 

 

연일 폭염잔치다. 나도 어디든 피서를 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밥솥의 잡곡밥을 조금 떠낸다. 양배추 삶은 잎으로 돌돌돌 밥을 말아 가벼운 그릇이 담는다. 그리고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던 책 한 권을 메는 가방에 넣고 혼자 산을 오른다.

맨날 가는 동네산이지만 오늘은 오래전에 가 본 그곳에 갈 생각이다. 그때 그곳은 사람 발길이 한적한 곳이었다. 커다란 바위 밑에 짐승이 자고 간 흔적이 있는 곳, 참나무 우거진 곳이다.

 

 

 

 

20여 년 전의 그곳과 별로 변한 거라곤 없다. 변했다면 그때 그 바위 밑 웅숭깊은 곳에 짐승이 잘만하던 공간은 풍파에 메워져 흔적만 남았다. 나는 그 어름, 보기 좋은 참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분홍 보자기를 꺼내어 펴고 참나무 기둥에 기대어 앉았다. 위세를 떨어보지만 내 몸의 크기란 게 요만하다. 나무 사이로 멀리 경마장이 보인다. 그쪽에서 가끔 바람이 분다. 산을 오를 때에 가슴으로 타고 내리던 땀이 슬며시 식는다. 이게 숲을 타고 오는 바람이다.

가져간 살림을 정리한다. 살림살이라 해봐야 딸아이가 중학교를 다닐 때 메던, 지금 내가 메고 온 오래된 책가방 하나, 분홍보자기 하나, 책 한권이 전부다. 오랜만에 단촐한 살림이다. 점심이 든 가방은 보자기 바깥에 놓아두고, 바르게 앉아 책을 편다.

 

 

 

 

처음에 읽어갈 때엔 나뭇그림자가 책을 가렸는데, 점점 그림자가 물러가고 해가 든다. 해가 들 때엔 책을 내려놓고, 대신 숲을 향해 귀를 연다. 매미소리가 찡, 울려온다. 숲이 물무늬처럼 흔들린다. 책에 집중할 수 있었던 데엔 매미들의 적당한 소음이 고맙게 있어주었다. 나뭇잎들 부딪히느라 사각대는 소리, 간간히 여린 풀벌레소리......

 

 

 

다시 곧추어 앉으려는데 달콤한 꽃내가 난다. 분명 초록 잎사귀 냄새와 다른 냄새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살핀다. 그래, 저쪽 어린 떡갈나무를 휩싸고 오르는 칡이 있다. 칡꽃이다. 칡꽃 곁으로 가본다. 코를 댄다. 칡꿀이 익었는지 냄새가 달다. 벌들한테는 안 된 일이지만 염치불구하고 칡꽃 한 송이를 따와 곁에 두고 앉았다. 책을 읽다 말고 코에 칡꽃을 댄다. 꽃꿀내가 가슴 깊숙이 스며든다.

 

 

 

 

보자기 바깥으로 다리를 내뻗고 눕는다. 주변을 의식할 데가 아니다. 나를 보고 있는 것들이라면 숲뿐이다. 참나무 가지들을 쳐다본다. 나뭇가지들이 서로 얽혀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다. 네 나무 내 나무 구분이 뚜렷하다. 울타리는 없지만 흔들흔들 흔들리느라 나무와 나무 사이에 마치 작은 물길처럼 길이 나 있어 네 나무 내 나무 구분이 분명하다. 그러면서 하나의 숲으로 어우러져 사는 게 나무들이다.

배고플 때까지 책을 읽다가 점심 밥그릇을 연다. 박카스 병에 담아온 물 한 모금, 양배추로 만 밥 네 개, 사과 한 쪽. 이게 나의 피서지에서의 점심이다. 혼자 나무들 보는데서 밥을 먹고, 혼자 거닐고, 그렇게 고즈넉히 나를 들여다 보다가 오후 3시가 넘어서야 일어섰다.

 

 

 

오늘 피서는 만족이다. 기껏 고리타분한 독서냐 하겠지만 솔직히 책 읽는 시간은 우리 삶속에 그리 많지 않다. 나는 오늘 자동차의 동력에 의존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막대한 피서경비에 짓눌리지 않았다. 아내와 의견이 맞지 않아 티격태격하는 심신의 소모가 없었다. 비록 몇 시간의 피서지만 혼자 고적하니 나와 이야기했다. 설악의 마등령이나 지리산의 관음봉에서 혼자 머물던 때와 또 다른, 도심 근처에서 맛보는 건편한 행복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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