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밭길을 걸어 나오는 결혼 풍경
권영상
옛 직장 동료로부터 자녀를 혼사시킨다는 청첩장을 받았다. 예식장이 호텔 웨딩홀이다. 요즘은 내남없이 호텔 웨딩홀이다. 원탁 테이블에 앉아 낯선 이들과 어색하게 얼굴을 마주하며 그 결혼식을 다 지켜보아야 하는 일은 정말이지 고역이다.
“딸아이가 좋다고 한다면 혼례를 안성집 마당에서 치러주면 어떨까?”
청첩장을 내려놓으며 내 생각을 아내에게 털어놓았다. 아내가 “어떻게?” 하며 관심을 보였다. 아내라고 몇 천만 원씩 든다는 우리네 결혼식 풍토에 왜 불만이 없겠는가.
“마당에 천막과 휘장을 치고, 전통혼례를 하든 서양식 혼례를 하든. 그리고 잔치음식은 마당에 가마솥을 걸고 국밥을 먹는 거야.”
나는 그쯤에서 아내의 눈치를 살폈다. 좋긴 한데 안성 시골까지 누가 내려가느냐? 내려간다 한들 찾아온 사람들은 어떻게 모실 거냐며 되물었다.
“조촐히 집안 분들만 모시는 거지뭐. 하루 전에. 우리 집 방이 모자라면 이웃 농가에 부탁해 주무실 방을 얻으면 안 될까?”
잠깐씩 내려가 머무는 안성집 주변엔 이웃만도 대여섯 집이나 있다. 집안 대사답게 밤늦도록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잠은 여러 집에 나누어 자고, 이튿날 좋은 기분으로 집안 분들의 축하를 받는다면 딸아이의 결혼이 더욱 의미 있고, 오래오래 기억될 듯싶었다.
내 말에 아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용도 적게 들고, 집안 분들의 축복을 온전히 받을 수 있다며. 그러더니 말끝에 근데? 하고 의구심을 드러냈다. 아내는 내 생각이 비현실적이라는 결론으로 끌고 가려고 관심 있는 척 들어주는 것 같았다.
“근데 남자애집에서 싫다면 어쩔 건데? 호텔 웨딩룸을 고집한다면 어쩔 건데?”
아내의 질문에 나는 낙담했다. 내 생각만 했지, 상대방의 뜻을 고려하지 못했다. 내 생각은 그만 거기에서 푹 꺾이고 말았다.아내는 고민스러워하는 내 표정을 짐짓 즐기는 듯 했다.
근데 오늘 나는 내가 꿈꾸던 이상적인 결혼식을 보았다.
영화배우 원빈과 이나영씨의 시골 결혼식이다. 강원도 정선, 원빈씨의 고향 근처 아름답게 펼쳐진 밀밭이 그들의 결혼식장이었다. 그들은 성인답게 아버지의 부축이 아닌 서로의 손을 잡고 푸른 밀밭 길을 걸어 나와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 앞에서 결혼을 하고 온전히 축하를 받았다. 예식장이 된 밀밭은 무료 예약이 되어 있었고, 웨딩컨설팅 업체가 끼어들 자리는 물론 없었다. 잔치음식은 호텔 음식이 아니라 초원에 가마솥을 걸고 부모님이 직접 만들어내신 음식과 국수로 대신했단다. 그들의 대범한 용기가 한없이 부러웠다.
호사가들이 이들의 결혼식에 들어갔음직한 비용을 추측해 보았단다. 민박 비용까지 합쳐 110만원. 고가의 기성품 결혼식을 했었다면 그들만의 결혼식이 되고 말았겠지만 그 모든 걸 포기하는 순간 그들의 결혼식은 모든 이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결혼식이 되었다.
그들의 아름다운 결혼식에 나는 용기를 얻었다.
딸아이와 남자애가 좋다고 하는데도 굳이 그쪽에서 호텔웨딩홀을 고집한다면…….
그러나 아직도다. 딱 부러지게 말 할 수 있는 용기가 아직도 좀 더 필요함을 느낀다. 딸아이 나이가 서른에 가깝다. 이제 머뭇거릴 시간이 많지 않다.
'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림자까지도 사랑해야지 (0) | 2015.06.21 |
---|---|
오동나무와 어머니 (0) | 2015.06.15 |
배 부른데도 자꾸 허전한 것은 (0) | 2015.06.13 |
꽃이 한창인 유월입니다 (0) | 2015.06.03 |
내 인생도 멋지잖아 (0) | 2015.05.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