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오동나무와 어머니

권영상 2015. 6. 15. 17:01

오동나무와 어머니

권영상

 

 

 

 

우면산 산길에 오동나무가 있다. 두어 아름씩 되는 오동나무가 민가를 두고 동네 산에 버젓이 기거하고 있다. 한 그루도 아니고 산을 오르고 내려오는 길에 예닐곱 그루는 좋이 살고 있다. 한 눈에 보기에도 그들의 나이가 적지 않다. 4,50년의 연륜을 가진 듯 하다. 머지않은 날에 꽃을 피울 모양이다. 꽃대가 가지 끝마다 꼿꼿이 선다. 팔을 벌려 오동나무를 껴안아 본다. 육친의 몸에서 풍기는 친밀감이 있다.

 

 

 

고향집에도 마당가에 아름드리 오동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그 옛날의 초등학교 적이다.

학교는 집에서 십여 리 거리였다. 그 먼 길에 나서는 학생이라곤 나와 나보다 서너 살 위의 동네 형 진만이가 있었다. 그는 학교 공부보다 새 둥지를 뒤지거나 풀밭에 드러누워 자는 걸 좋아했다.

“뺑소니치자.”

어느 날 책보를 메고 앞서 걷던 그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보다 두 학년이나 낮은 나는 망설였다. 벌써 이런 유혹이 여러 차례였다. 그때마다 나는 그의 청을 거절했다. 학교 가는 일을 도중에 그만 둔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아직 3학년 밖에 안 되는 나는 그럴 용기조차도 없는 어릿배기였다.

 

 

 

“개개비 잡으면 너 줄 게.”

그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내 대답이 떨어지자, 진만이 형은 나를 데리고 마을 수수밭 이랑에 숨어들었다. 거기 깊은 곳에 책가방을 숨겨놓고 갯가로 달려 나갔다.

하늘을 가릴 만큼 키가 큰 갯가 갈대숲을 헤치고 다니며 개개비 둥지를 뒤지고, 갈대로 잉어를 잡고, 그래도 심심하면 소나무에 올라가 먼데 대관령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치며 놀았다. 점심때가 되자, 진만이 형은 부모님이 일하러 나가고 없는 자기 집으로 나를 데려가 밥을 주었다. 그리고 그를 따라 낮잠도 잤다.

 

 

 

“책보 가지러 가자.”

얼마나 잤는지 잠에서 깨어난 진만이 형이 벌떡 일어섰다. 그제야 나는 내가 오늘 하루 뺑소니를 쳤다는 걸 실감했다. 우리는 수수밭에 숨겨놓은 책가방을 찾으러 갔다. 근데 암만 찾아도 있어야할 곳에 있어야할 책가방이 없었다.

“엄마한테 뭐라고 하지?”

나는 그걸 둘러댈 머리가 안 됐다.

진만이 형과 헤어져 걱정스럽게 빈손으로 집에 갔다. 몰래 들어가면 되겠지 했지만 그날따라 어머니가 마당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가방은 학교에 두고 오느냐?”

내가 미처 생각 못한 핑계를 어머니가 대신해 주셨다.

“무거워서 학교에 두고…….”

나는 간신히 방에 들어가 어서 오늘이 지나가기를 기도했다.

 

 

 

 

저녁이 되고, 이윽고 어머니가 저녁상을 들고 안방에 들어오셨다. 아버지도 누나도 모두 모였다. 어머니가 밥상을 내려놓더니 뒷방에서 가방을 들고 오셨다. 나는 깜짝 놀랐다. 수수밭에 숨겨둔 내 가방이 어머니 손에 들려있었다. 얼마 전 어머니가 사주신 그 가죽가방이었다.

“대추나무집 할아버지가 주시더라.”

분명 등에 메는 내 가방이었다.

 

 

 

어머니는 식구들이 보는 앞에서 내 손목을 잡고 마당가 오동나무에 가셨다.

“학교를 싫어하는 네가 엄마의 아들이 되었다니!”

어머니는 나를 오동나무에 묶으셨다.

나는 용서를 빌었지만 어머니는 단호하셨다.

“끊으려면 네 마음대로 끊고 뺑소니치듯 달아나렴.”

그러고 어머니는 안방으로 들어가셨다.

 

 

 

나는 오동나무에 묶인 채 울었다. 밥 먹는 밥상 앞에 함께 앉지 못한다는 게 두려웠고, 점점 어두워지는 마당에 혼자 남아있다는 게 서러웠다. 어디론가 달아나고 말 테야. 내가 없어지면 엄마만 손해일 테지. 나는 그런 엉뚱한 생각으로 울음을 그쳤다. 이미 사방은 어두웠다. 안방에서 들리던 저녁 먹는 소리도 멎었다. 식사가 끝났는지 등잔불빛이 어리는 문에는 누군가의 그림자가 어룽거렸다.

나는 달아나려고 나를 묶은 끈을 내려다보았다. 어둠 속이었지만 그 끈만은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 끈이란 무명 바느질실이었다. 어머니는 그 실 한 파람으로 나를 묶어놓으신 거였다. 끊으려면 힘을 주고 말고 할 것도 없는 실이었다.

 

 

 

“끊으려면 네 마음대로 끊고 뺑소니치듯 달아나렴.”

그러시던 어머니 말씀이 다시 떠올랐다.

어머니는 내 마음을 떠 보시려 했던 것이다. 오늘 하루 학교를 빠진 나의 행동이 옳은 건지 아닌지를 스스로 생각하게 하신 거였다. 내가 저지른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달아나려 했다면 바느질실이 아니라 동아줄인들 끊고 달아나지 못할까.

나이는 어렸지만 그 순간, 그걸 생각하려니 오히려 나를 묶어놓은 이 실이 끊어질까 그게 또 걱정이었다. 나는 옴짝도 못한 채 어머니가 나오시기만을 기다리며 나의 잘못을 뉘우쳤다.

 

 

 

오동나무 잎 사이로 별이 새파랗게 빛날 즈음 아버지가 안방에서 나오셨다.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없이 발소리를 내며 내게 다가오셨다. 그 밤 아버지의 몸은 거인처럼 거대하게 보였다. 그 아버지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으셨다. 그러더니 아무 말씀도 없이 어머니가 묶어놓으신 실을 푸셨다.

“들어가 밥 먹어라.”

그러고는 나를 묶었던 무명실을 내 손에 얹어주셨다.

그날 이후 나는 무명실을 필통에 넣어두고 학교에 다녔던 기억이 있다. 아마 그 후 뺑소니를 친 적이 없는 걸 보면 그때마다 필통 속 무명실에서 어머니를 보았기 때문인 듯하다.

 

 

오동나무에 무명실로 나를 묶으셨던 어머니도, 나를 풀어주셨던 아버지도 이제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먼 곳에 가 계신다. 아련한 추억처럼 산길에 우두커니 서 있는 늙은 오동나무를 다시 한번 껴안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