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나무는 춤 출 줄 안다

권영상 2015. 6. 25. 15:29

나무는 춤 출 줄 안다

권영상

 

 

 

바람소리가 마을을 흔든다. 토마토 순을 묶다말고 나는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고추밭 건너편 야산의 숲이 춤추듯 일렁인다. 바람의 근원은 산 너머 넓은 논벌이다. 거기서 몰려오는 바람을 나무들이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받아 안는다. 바람을 피하는 나무가 어디 있으랴마는 앞산의 순진한 나무들은 사시사철 바람을 상대한다. 그렇다고 그들이 세상의 부조리와 맞서는 투사형 나무들인가 하면 그도 아니다. 그들은 세상의 부조리를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되 얽매이지 않고 저들의 인생을 즐기는 나무들이다.

 

 

 

세상 풍파를 아는 장년의 나무들이다. 나무 중에서도 참 세상을 아는 참나무와 간간히 선 낙엽송이 주종이다. 나는 점잖은 노송들 보다 실수가 좀 있는 이만한 나이의 나무들이 좋다. 나무라면 통상 살아남기 위해 남의 영역을 침범하거나 더 많은 햇빛을 차지하기 위해, 또는 이웃을 지배하기 위해 무례해지거나 때로 비굴해지거나 때로 가족을 들먹이며 탐욕을 저지른다. 그러나 우리 건너편 야산에 기거하는 나무들은 그들 나무와 종족이 완연히 다르다. 마치 파도를 타러 모여든 윈드서퍼들 같다. 오직 바람을 기다린다. 바람 이외의 것을 탐내는 걸 나는 저들 나무에서 본 적이 없다.

 

 

 

 

행여 바람이 불면 나무들은 기다렸다는 듯 어깨를 들썩이며 우우우 흔들린다.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몸을 뉘였다가 다시 되돌아오는 그 관성의 일렁임이야말로 춤에 익숙한 춤꾼의 몸놀림이 아닐 수 없다. 흐느끼듯 나뭇가지들을 들어 올렸다가 다시 툭 떨어뜨리는 그들의 수직적 춤사위는 볼수록 내 마음을 들뜨게 한다.

그들의 춤을 가만히 보면 몸과 마음의 긴장이 다 풀린 듯하다. 흔들흔들, 세상을 터득한 사람의 여유로운 모습이다. 삶을 짓누르는 무게를 벗어버린 가볍고도 유연한 모습이다. 일 없는 사람처럼 빈둥빈둥 빈둥대는, 둥실둥실 둥실대는, 춤추는 듯 노는 듯 태연하다. 바라보는 나조차 일상을 아주 딱 잊어버리게 한다. 유유히 흘러가는 물굽이에 마음을 놓듯 넋을 빼앗는다.

 

 

 

나는 하던 손을 놓고 밭에서 나와 우두커니 산을 바라본다. 같은 사람 중에도 노는 것을 경시하는 이들이 있듯 나무라고 다들 저렇게 춤추듯 놀지 못한다. 진지한 일상을 가볍게 해석할 줄 아는 나무들이라야 자신을 바람에 내맡긴다. 소홀히 넘겨도 될 일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나무는 바람이 불어도 춤추지 못한다. 관절이 굳어있기 때문이다. 꼿꼿하게 사는 삶만이 아름답다고 규정 지어놓고 사는 나무도 이리저리 흔들리는 걸 경계한다.

 

 

 

그렇게 풍향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나무들이 있다. 그들이 바로 대세에 휩쓸려갈까 두려워하는 나무들이다. 그들은 스스로 풍향을 거스르기를 자처하는 나무들이다. 바람과 싸워 이기려는 나무들이다. 그들의 육신과 영혼은 그러기에 늘 피로하다. 그러나 건너편 산의 나무들은 다르다. 그들은 육신이 영혼보다 더 위대하다고 믿는다. 그들에게 있어서 영혼이란 육신이 있을 때만 가능한 종속물에 불과하다. 육신이 배 곯으면 영혼도 배 곯듯 육신이 자유로우면 영혼마저 자유롭다고 여긴다. 피로하게 사는 걸 거부하는 게 아니라 심각하게 사는 걸 싫어한다.

 

 

 

춤추지 못하는 나무는 나무가 아니다. 나무들에게 있어 춤은 곧 사는 법 그 자체다. 사방을 찾아보아도 건너편 산의 나무들만큼 안녕히 잘 사는 나무들도 없다. 그들은 노는 듯 하지만 마을을 감싸는 방풍의 책무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성실히 하되 춤추듯 놀듯 빈둥빈둥 빈둥거리며 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