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부른데도 자꾸 허전한 것은
권영상
“길고 커다란 마루 위 시계는
우리 할아버지 시계,
90년 전 할아버지 태어나던 날 아침에
받은 시계란다.”
문득 외국 동요 ‘할아버지 시계’가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6월이면 예전 내가 다니던 학교의 음악실에서 울려나오던 노래다. 이야기가 있고, 곡이 쉽고 애잔해 금방 외웠다.
마루 위에는 커다란 괘종시계가 있었다. 그 시계는 할아버지가 태어나던 90년 전 아침에 받은 할아버지의 선물이었다. 근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 시계도 멈추고 말았다는 할아버지와 시계를 동일시한 노래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나도 이 방 저 방을 살폈다. 할아버지의 시계처럼 나와 오래도록 함께한 나의 것을 찾아보고 싶었다. 옷장도 열어보고, 책장이며 책상 서랍도 열어봤다. 여러 형제의 막내로 살았고, 일찍 집을 떠나 도시생활을 해 그런지 이렇다하게 내놓을 과거가 없다. 부모로부터 받은 유품도 없거니와 오래 간직한 애장품도 없다. 결혼을 한 뒤 여러 차례 이사를 했고, 그러느라 장롱도 새로 바뀌었고, 식탁이며 텔레비전도 여러 차례 바뀌었다. 나이 들어 이것저것 사 모은 것은 있으나 나와 함께한 시간이 턱없이 적다.
그렇게 낙심할 때에 내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탁상시계였다. 탁상시계는 내 책상 한 자리를 오래도록 지켜왔다. 매일 나와 마주하면서도 시계를 보는 것 이상의 존재감을 나는 탁상시계에서 느끼지 못했다. 그는 늘 과묵했다.
탁상시계는 내가 결혼을 하고, 신혼집을 차렸을 때 우리 집을 찾은 직장 동료들이 준 선물이다. 디자인이 단순한 금빛 네모 시계다. 시계는 직장에 매여 힘들게 사는 나의 모습이며, 자식을 낳아 힘겹게 키우는 일과 사는 일에 서툴러 아내와 싸우고 고민하던 모습을 줄곧 보아왔다. 더구나 40여 년간 글을 쓰며 살아왔으니 탁상시계는 나의 시간을 단 한 시도 놓치지 않고 지켜온 나의 성실한 동행이나 다름없다.
이즈음에 와 그 탁상시계의 초침이 가는 소리를 듣는다. 늘 그 자리에서 쉬지 않고 돌아갔을 시계소리가 이제 와 귀에 들리는 것은 어쩌면 지금 내 인생이 허전하다는 뜻일 수도 있겠다. 직장을 물러나와 내 나이에 맞는 일을 한다며 부산을 떨지만 나의 내면엔 외로움 같은 허전함이 있었다. 가만히 시계소리에 귀 기울여 본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젊은 날 나를 재촉했을 그 소리에서 지금은 편안한 아버지의 목소리를 느낀다. 고향 사랑방에 걸려있던 괘종시계에 대한 추억 때문일까.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책상 한 자리를 오래 지켜준 까닭도 있겠다. 마치 고향의 뒤란 장독대처럼, 고향 동구에 서 있는 늙은 정자나무처럼, 고향의 옛 친구들처럼, 고향의 그 강이며 그 하늘처럼, 부모님처럼. 탁상시계가 변함없이 그 자리에 늘 머물러 있어 주었다는 건 위안 치고 충분한 위안이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도 빠르게 우리가 앉았던 자리를 버려왔다. 내 집 한 칸을 마련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이사를 했고, 시대에 맞지 않는다며 오래 자리하고 있던 장롱을 버리고, 오래된 책을 버리고, 구형이라며 컴퓨터를, 승용차를, 텔레비전을, 구식이라며 오래된 관습을, 문화를 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새 것을 앉혔다. 미처 정을 들이기도 전에 뜯어고치거나 바꾸는 일을 즐거이 했다. 그걸 눈부신 발전이라고 외치면서.
“가끔씩 한국 들어가 보지만 너무 요란하게 변해 남의 나라처럼 낯설 때가 많어.”
외국에 나가 사는 친구들과 전화할 때마다 심심찮게 듣는 말이다. 그들만 그런가? 우리도 마찬가지다. 어쩌다 예전에 살던 동네에 가보면 현기증이 날 만큼 놀란다. 그때에 있던 문방구며 상회며, 그때에 있던 나무며 우리 살던 집조차 다 없어진, 전혀 다른 동네를 본다. 급속한 변화를 자랑삼아 살아오는 동안 우리는 너무도 많은 것을 잃었다. 그래서 얻은 것은 새 것에 대한 벅찬 감정이 아닌 상실감 뿐이다. 우리의 삶이 지금 배부른데도 자꾸 허전한 것은 우리 내면에 숨어있는 이 상실감 때문이다.
“길고 커다란 마루 위 시계는 우리 할아버지 시계,
90년 전 할아버지 태어나던 날 아침에 받은 시계란다.”
90년 된 시계라고해 단지 오래된 것만이 아니다. 고향의 아버지처럼 한 자리에 든든히 있어주는 것이며, 위태로운 영혼을 위로해주는 것이며 켜켜이 정을 쌓아간다는 뜻이다. 그러나 새 것은 우리를 낯설게 하고, 불안하게 하고, 멈출 줄 모르고 자꾸 앞을 향해 달려 나가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상실감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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