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꽃이 한창인 유월입니다

권영상 2015. 6. 3. 12:44

꽃이 한창인 유월입니다

권영상

 

 

 

 

 

세상이 한창 꽃 피는 유월입니다. 마당에 붉은 장미가 불타듯 피고 있네요. 울타리에 줄장미 십여 그루를 심었는데 그들도 정오를 즐깁니다. 창 밖 모란과 메이플이 지고 난 자리에는 낮달맞이꽃이 노랗게 머리를 맞대고 핍니다. 백일홍도 여러 점 심었는데 피려는지 벌써 꽃망울이 맺혔습니다. 유월이면 배롱나무도 온화한 꽃을 피우겠지, 하고 요사이는 넉넉히 물을 줍니다.

 

 

 

마당에 꽃 피우는 일이 그 얼마만인가요? 내 손으로 피우는 꽃이라 기특하지 않은 꽃이 없습니다. 어렸을 적 오랍들 고추밭 둘레에 해바라기며 봉숭아를 심던 일이 떠오르네요. 농사를 지으시던 아버지는 땅 한 뼘도 허투루 쓰지 않으셨지요. 그런데도 내가 심어놓은 꽃들만은 어쩐지 탓하지 않으셨습니다. 농투성이 아버지도 땅 위에 꽃 피는 일만은 사랑하셨던 모양입니다. 그 어릴 적의 꽃을 심던 기억이 내 손에 남아 있어 올해도 해바라기와 프렌치 마리골드, 참나리, 분꽃, 채송화 모종을 많이 했습니다.

 

 

 

어제 아침에 집 앞 벽장골에 나갔습니다. 모내기를 끝낸 논벌에 모살이를 마친 모가 파랗게 크고 있었습니다. 모가 크는 무논을 보고 있으려니 밥 한 그릇을 먹고난 뒤의 기분처럼 배가 든든합니다. 근데 굵직굵직한 논두렁에도 꽃이 한창입니다. 애들 키만한 보랏빛 지칭개가 그들입니다. 약을 치지 않은 깨끗한 논두렁이라 개망초도 달걀프라이꽃을 잘 피워내고 있었습니다.

 

 

 

한 바퀴 벽장골을 돌아올 땐 도랑길로 왔습니다. 도랑둑 너머 그늘진 나무숲엔 찔레꽃이 한창이었습니다. 서울엔 찔레꽃 진 지 오래 되었는데 여긴 이제 피고 있습니다. 찔레꽃 보며 찔레순도 꺾어 맛을 보며 아랫말로 들어섰습니다. 쥐똥나무 울타리길을 휙 돌아서는데 눈앞 마늘밭에 꽃불이 붙었습니다. 밭을 에워싼 화초양귀비입니다. 피어도 피어도 어쩌면 그렇게도 요란하게 피었을까요. 요염한 색깔을 아주 한없이 풀어헤쳤더군요. 휴대폰 카메라로 그걸 찍고 있는데, 그 댁 할머니가 비닐하우스로 나가시다 나를 보았습니다.

 

 

 

“양귀비가 이 꽃만큼 이렇게 이뻤을까요?”

나는 꽃에 눈을 빼앗기며 여쭈었지요.

“부끄럽게시리.”

할머니가 손사래를 치십니다.

할머니 보시기에도 화초양귀비가 요염하였든가, 아니면 입에 담기조차 부끄러운 요부였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했습니다.

“그거 말고 우리 아들이 가꾼 꽃 한번 보고 가요.”

할머니가 나를 데리고 안마당으로 돌아들어가셨지요.

“야, 놀랍네요. 이 장미!”

나는 비명을 질렀습니다.

땅이 좋아 그런 건가요? 장미꽃송이가 어른 국대접만 합니다. 아니 누가 쓰다가 벗어둔 벙거지모자만 합니다. 나무는 안 보이고 장미꽃만 그득히 벙글었습니다.

 

 

 

 

“여기 이건 함박꽃이라오. 이게 필 때 나는 잠을 못 잤지요. 너무 탐나서.”

할머니가 가리키시는 안방 창문 밑엔 막 피고 진 작약이 초록잎을 키우고 있었답니다. 할머니 눈엔 지금도 그 작약꽃이 선하게 남아 있겠지요.

함박꽃이 아니고 작약이네요? 그러자 아니, 함박꽃. 그러셨습니다. 집에 돌아와 찾아보니 함박꽃이 작약의 다른 이름임을 알았습니다. 작약이란 이름이 너무 한문 투여서 글속에 집어넣기가 거슬렸는데 오늘 비로소 꽃에 걸맞은 이름을 새로 얻었습니다.

 

 

 

이메일 함을 열었더니 시카고에 살고 있는 친구한테서 꽃사진이 왔습니다. 좀 전에 내가 알았던 작약인 함박꽃입니다. 진한 자주색 함박꽃 네 송이입니다. 어찌나 반갑던지요. 그네 집 뜰에도 이쪽의 뜰처럼 꽃이 한창인 모양입니다. 펜실베니아에 살고 있는 친구는 일이 바빠 사진 찍으러 나갈 틈이 없다면서도 사진 넉 장을 보냈습니다. 장미와 나리, 아카시꽃, 화초양귀비이지요.

 

 

 

 

꽃 사진을 받고 보니, 지금 지구에는 꽃이 한창입니다. 꽃이 한창이라는 말은 생명이 살기에 너무도 적절한 때라는 뜻이겠지요. 아직도 다음 시절을 기다리는 꽃들이 많습니다. 나리꽃이 있고, 엉겅퀴, 병꽃, 노루오줌, 비비추, 백일홍, 원추리, 맨드라미며 완두콩꽃이 때를 기다리고 있고, 우리 마당에 한창 크고 있는 프렌치 마리골드와 해바라기가 더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상에는 하루도 꽃 피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상에는 하루도 전쟁 그치는 날이 없습니다. 누가 이 지상의 주인이 되어야 하나, 그 생각을 해 봅니다. 이렇게 한창 꽃 피는 날에도 사람들은 이념과 민족이라는 허상을 앞세워 총으로 누군가의 심장을 겨누고 있습니다.

이 땅을 꽃 피우는 들꽃 한송이의 의지가 소중해지는 유월입니다. 소리없이 피어나는 엉겅퀴꽃을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