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그녀는 사랑의 이름으로 태어났다

권영상 2015. 5. 28. 11:41

그녀는 사랑의 이름으로 태어났다

권영상

 

 

 

 

창밖을 내다본다. 도심의 밤이 이슥하다. 하던 일을 놓고 일어섰다. 그녀를 만나러 가기 위해 옷을 갈아입었다. 시계를 보니 자정이 가깝다. 낮 기온은 30도를 오르내리지만 밤은 춥다. 더구나 내가 그녀와 만나기로 한 곳은 요 앞 한적한 골목이다. 나는 한적한 골목길을 생각하며 짧은 반팔 티셔츠 위에 긴팔 남방셔츠를 걸쳐 입었다.

“어딜 가려고? 이 밤에.”

아내가 못 본 척 할 리 없다. 내 옷차림을 쓱 훑더니 누굴 만나러 가나며 앉은 채 나를 쳐다본다. 누구는 누구! 나는 속을 들킨 사람처럼 당황한 기색으로 집을 나선다.

 

 

 

밤은 깊을 대로 깊다. 들락이는 사람조차 없다. 아파트 마당을 걸어 뒷문을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저기 느티나무 끝에 서쪽으로 가는 달이 혼자 머물러 있다. 초생달이다. 어스름한 밤. 그녀를 만나러 가는 이런 풍경이 나는 좋다. 이런 은밀한 풍경일수록 그녀를 향한 내 사랑이 부푼다.

 

 

 

가끔 그녀를 만나보지만 그녀를 만나기엔 낮보다는 밤이 좋다. 그녀도 내게만은 밤을 원한다. 30도씩 폭염이 왕성한 한낮에 보는 그녀에게선 감동이 없다. 은은한 감정을 느낄 수 없다. 인적 하나 없는 이런 밤 나를 기다려주는 그녀를 생각하며 호젓이 걷는 일은 나를 설레게 한다. 요부는 분명 이슥한 밤에야 아름답다. 그녀의 황홀한 몸도 밤이 되어야 더욱 잘 피어난다. 그녀가 나를 기다릴 때면 언제나 위태로이 담벽에 기대어 서 있다. 그녀와의 사랑은 그렇게 위태롭다. 위태로운 사랑일수록 짜릿하지 않은가. 도발적인 빨간 입술로 팔짱을 낀 채 위태롭게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을 나는 사랑한다.

 

 

 

 

그녀에겐 특유의 향기가 있다. 반쯤 열린 그녀의 몸에 코를 대면 그녀의 그윽한 향기에 나는 취한다. 그녀에겐 그처럼 강한 향기가 있다. 내가 지금 그녀를 찾는 것은 그녀의 향기에 대한 기억 때문일지 모른다. 그녀는 그녀 특유의 향기로 내 몸을 이끈다.

 

 

흐릿한 초생달빛을 밟으며 골목을 막 돌아설 때다. 그녀가 약속한 거기에 와 서 있다. 가슴이 쿵쿵쿵 뛴다. 가슴을 진정시키며 천천히 그녀에게로 다가간다. 그녀도 그녀 특유의 몸짓으로, 너무 경망스럽지도 않게, 아니 너무 야하지도 않게 담장 너머에서 이쪽 골목길로 길게 몸을 빼고 내게 웃음을 보인다. 밤에 보는 그녀의 얼굴은 그윽하다. 어둠이 그녀의 몸을 깊고 고혹스럽게 만든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선뜻 다가설 수 없을 만큼 독한 카리스마가 있다. 늘 경험하지만 섣불리 그녀에게 다가섰다가는 상처 입기가 쉽다. 하지만 한번 마음을 열기 시작하면 그녀도 자신의 감정을 걷잡지 못한다.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선다. 그녀의 빨간 입술이 나를 원한다. 나는 천천히 그녀의 몸에 깊숙이 코를 밀어넣는다. 클레오파트라의 예민한 귓볼이 흠칠한다. 안토니우스가 숨결을 불어넣는다. 순간 클레오파트라의 귓볼에서 요염한 장미가 핀다. 장미가 붉은 입술을 열며 안토니우스의 귀에 속삭인다. 내 몸이 곧 클레오파트라라고. 훗날 옥타비아누스의 손에 안토니우스가 죽어갈 때 그는 애원했다. 내 무덤에 장미를 뿌려달라고.

 

 

 

나는 천천히 그녀의 몸에서 코를 뗀다. 미인이 그렇듯 그녀는 독선적이다. 한번 그녀를 경험하면 일생을 그녀만 생각해야 하고, 한번 그녀를 경험하면 그녀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던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아니 그녀를 위한 찬미의 시를 쓰거나 찬미의 송가를 불러야 하며, 그녀를 바라보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그녀는 사랑이면서 연인을 떠올리게 하는 기억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사랑을 할 때 우리는 누구보다 먼저 그녀를 떠올린다. 그녀는 사랑의 이름으로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