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하는 구두
권영상
내게 있어 신발이란 소중한 재산이다. 그런 까닭에 다른 건 쉽게 버려도 신발만은 버리지 못한다. 신발이 내 심장 같다면 과장일까.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신발 한 켤레를 구하자면 몇 며칠이 필요하다. 시골에서 자랄 때엔 그 도시의 신발가게를 다 돌아다녀도 구할 수 없었고, 늦은 나이 서울에 정착할 때도 신발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 오랜 수고로움 끝에 간신히 신발을 구했다면 그건 심장보다 더 소중할 수 있다. 신발에 대한 이런 내 특별한 애착의 배경엔 경이로운 내 발이 있다. 내 발이란 다들 탄성을 내지르는 290밀리의 흔치 않는 발이다.
누구든 이처럼 큰 발을 지니고 살아보라. 그에 맞는 신발이 심장 만큼 소중한 걸 알리라. 오랜 기성품 시대를 살아온 내게 있어 신발은 극복할 수 없는 벽이었다. 학창시절부터 나는 발에 맞는 운동화가 없어 뒤축을 꺾어 신고 다녔고, 내가 사 입는 옷의 바지나 소매는 너무 짧아 언제나 덧대어 입어야 했다. 내 사이즈는 분명 조국 근대화 시절의 기성품 규격을 넘어서고 말았다. 표준을 강조하던 1970년대의 눈으로 볼 때 나는 비표준이었고, 비정상이었다. 그 무렵 내게 닥친 일생일대의 고민은 군 입대였다. 군대에 입대해야 표준 남성으로 쳐주던 시절이었으니 나의 대발은 나의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내 발에 맞는 군화가 없다는 사실에 나는 절망했고, 결국 군 입대를 못한 나는 기성품시대의 아웃사이더가 되고 말았다.
내게는 내 발에 얽힌 그런 아픔이 있다. 다들 기성품 운동화를 신을 때 그 대열에 끼지 못하였고, 다들 기성품 의류매장에서 제 몸에 맞는 옷을 척척 입고 나올 때 나는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사들고 나와 천을 덧대어 입는 서러움을 겪어야 했다.
그뿐인가. 빙판이 좋은 호숫가에 살면서도 발에 맞는 스케이트화가 없어 남들 다 즐기는 스케이팅을 포기했고, 스키장까지 따라가서도 스키 대신 내 발을 한탄하며 술이나 마셨다. 설악의 대청봉을 오를 때도 지리산 관음봉을 오를 때도 나는 뒤축을 구긴 운동화거나 슬리퍼를 신었다.
그러던 1990년대 후반이다. 유럽의 문물이 하나 둘 들어오면서 내 눈에 윙팁구두도 들어왔다. 다른 구두도 아닌 윙팁이라니! 여태 나는 구두를 신었지만 브랜드를 가리지 않았다. 디자인이며 색상 따윈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발에 맞는 구두가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감사했다. 그런데 내가 꿈꾸던, 그것도 내 발에 딱 맞는 윙팁을 얻었다. 남자라면 한번쯤 신어보고 싶은 클래식 수제화. 발등에 W 무늬가 있고, 박음질을 따라난 펀칭 스타일의 구두. 탄탄한 설계와 편안하고 안정감 있는 윙팁을 얻었을 때의 내 기쁨은 신세계를 발견한 항해자의 기쁨보다 더 컸다.
나는 고향이 스코틀랜드인 윙팁구두를 직장이나 가정에 경사가 있을 때나 한번씩 꺼내어 신었다. 그러며 은근히 기성품의 세계에 들어선 나를 뻐겼다. 내발도 이제 당당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근데 무렵부터다. 사이즈가 큰 품격 있는 외국브랜드 구두며 옷이 우리 시장을 밀물처럼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나는 발을 가두는 윙팁구두를 벗고 걷기 편리한 캐주얼화로 갈아타기 시작했다.
“그러나 딸아이가 결혼할 때 그때 신고 나가리라.”
나는 가끔 신발장 속의 윙팁구두를 꺼내어 신어 본다. 신어볼수록 탄탄하고 멋있다. 내 발에 맞는 구두가 없어 고민할 때 나를 수렁에서 건져준 게 이 구두다. 나의 구주인 셈이다. 이 구두를, 단지 오래됐다는 이유로, 아니 내 발에 맞는 구두들이 넘쳐난다는 이유로 버릴 수는 없다. 적어도 한번의 영광은 안겨주고 싶다. 딸아이의 손을 잡고 예식 홀의 붉은 카펫을 밟을, 그 황홀한 기쁨을 그에게 주고 싶다.
그 때를 위해 나는 가끔 신발장 속의 윙팁을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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