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 연재 칼럼

폭설 때문에 잘못 든 길

권영상 2015. 2. 1. 14:47

폭설 때문에 잘못 든 길 

권영상

 

 

 

 

 

대설특보답게 11월의 큰 눈이 내립니다. 11월의 눈답지 않게 푸짐합니다. 마침 나는 이때에 운 좋게도 산을 오르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단풍잎 폭 쏟아진 숲길을 조용히 지나고 있었지요. 바로 그때였습니다. 나는 멀쩡한 길을 두고 그만 딴전을 피우고 말았습니다. 푸짐하게 내리는 눈 때문이었을까요. 가지 않던 길로 발을 옮겼습니다. 멀쩡하게 가고 있는 나의 방향을 11월의 눈이 그렇게 바꾸었습니다. 그 길에도 낙엽이 곱게 쌓여 있었는데 누군가 걸어간 자국이 어렴풋합니다. 이런 날은 쉽고 편하게 오르는 길이 싫어지지요. 그런 길이 오히려 사람을 피곤하게 합니다.

 


 

 

처음 가는 길은 처음 맛보는 과일 맛처럼 새롭지요. 잠깐 비켜났는데도 갑자기 숲이 호젓해지는 느낌입니다. 비죽 나온 나뭇가지 밑을 지날 땐 허리를 숙이고, 발 아래 나뭇가지는 타넘습니다. 찔레덩굴을 지날 땐 빙 에둘러 갑니다. 재미있습니다. 못 보던 바위를 타고 넘고, 눈에 젖은 풀섶에 신발을 함빡 적시며 갑니다. 오색딱따구리도 만나고, 두더지가 파올린 봉긋한 흙더미도 만납니다. 이게 남들이 잘 가지 않는 길의 길맛인가 봅니다.

 

 

그런데 풀섶 길이 점점 길어지더니 그만 길이 뚝 끊어졌습니다. 아무리 기웃거려도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처음 이 길로 들어설 땐 분명 사람 발자국이 보이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 길이 왜 사라졌을까요. 나는 길이 숨어 있음직한 곳을 더듬어 여기저기 걸어나가 보았습니다. 그러나 덩굴이 얽혀있어 번번이 되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잘못 든 길입니다. 나는 지리산이나 설악의 산속에서 이런 경험을 종종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여기까지 살아오느라 길을 잘못 들어 헤맨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이처럼 잘못 든 길 끝에 서면 자연히 생각이 많아집니다. 돌아갈까 말까. 여기까지 온 시간과 정열 때문에 망설여집니다. 그렇다고 그 너머의 길을 고집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기엔 날이 곧 저물기 때문입니다. 돌아서기도 아깝고, 그냥 가기도 험난한 길 끝에 서 있는 나를 바라봅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되돌아섰습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그렇게 잘못 든 길이 바르게 걸어온 길보다 더 선명하게 머리에 남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잘못 든 길 하나 없이 오직 곧고 바르게만 걸어왔다면 지금 내 인생의 모습은 또 어떠할까요. 처음에 꿈꾸었던 내 인생의 목표는 쉬이 이루었겠지만 그러느라 목표보다 더 아름다운, 사소하지만 오래 기억되는 인생의 부분 부분을 놓친 아쉬움에 가끔 눈물 흘리고 있을지 모르겠네요.

 

 

나는 더이상 갈 수 없는 길 저쪽 편을 바라보았습니다. 산버들가지가 얽혀있고, 키 작은 나무들과 덩굴이 가로막고 있습니다. 좀 힘들어도 그 길을 뚫고 가면 미답의 새로운 풍경을 만날 수 있겠지요. 그러나 나는 그 풍경을 마음에 그리며 그만 돌아섰습니다.
나는 오늘, 뜻밖의 대설특보 때문에 내 마음에 여백과도 같은 미답의 길을 하나 더 두게 되었습니다. 인생을 오르듯 이 산을 오를 때면 나는 가끔 어느 나무 밑에 우두커니 서서 그 길 너머를 생각하고 있을 테지요.

 

<교차로신문 2013년 12월 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