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 연재 칼럼

나무는 우리에게 기적을 보여준다

권영상 2014. 12. 24. 16:55

나무는 우리에게 기적을 보여준다 

권영상

 

 


 

 

가을비가 내렸다. 이 비 그치면 기온이 떨어진다고 한다. 기상예보 탓인지 바깥 풍경이 을씨년스럽다. 주말 아침마다 가던 산행을 미적거리다가 손수건을 목에 두르고 장갑을 찾아 끼고서야 집을 나선다.
산자락에 들어서다 말고 은행나무 한 그루와 딱 마주쳤다.
“이거야말로 기적이구나!”

 

 


나는 샛노랗게 물든 은행나무를 쳐다보며 소리쳤다. 눈이 어릴 만큼 샛노랗다. 순금빛이다. 지난 달까지 초록이던 나무가 노란 몸으로 변신해 있다. 우리 눈이 이런 모습에 해마다 익숙해져서 그렇지 이거야말로 기적 같은 일이다. 엽록소가 분해된 뒤의 카로틴의 장난이라고 이해하기 전에 이건 분명 자기혁명이며 기적이다.

 

 


나무들은 이처럼 자기 변혁의 능란한 힘을 가지고 있다. 추위와 배고픔에 떨던 겨울 대지를 일시에 초록으로 바꾼다. 산을 바꾸고, 들판을 바꾸고, 마을을 바꾼다. 죽음 직전까지 간 대지를 살려일으켜 세우는 것이 나무가 뿜어내는 초록이다. 나무들이 초록으로 세상을 바꿀 때 우리들 마음은 또 얼마나 설레이는가. 나무는 이처럼 저들을 바라보는 이의 내면까지 초록으로 바꾸어내는 변혁의 힘을 가지고 있다.


 

 

꽃은 아름답다. 그것은 또 누가 만들어 내는가. 누가 대지에 고운 색깔을 입힐 줄 알고, 누가 꽃을 피워 세상을 향기롭게 만들 줄 아는가. 그 일을 할 수 있는 건 나무이다. 나무는 꽃을 피워 세상을 향기롭게 한다. 그렇지 않고야 도심의 중심에 나무가 설 수 없다. 자연에 인색한 인류가 나무에게 금싸라기 같은 도심의 땅을 내어주는 건 나무가 우리의 영혼을 향기롭게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나무의 이런 선량한 행적에 그다지 놀라지 않는다. 그건 나무의 삶이 어머니처럼 지나치도록 헌신적이기 때문이다.


 

 

겨울나무의 이타적인 헌신을 보라. 다들 추위가 두려워 가진 것으로 온몸을 감쌀 적에 나무들만은 그 반대로 가진 잎을 다 버린다. 그들이 떨어뜨린 낙엽은 발 아래에 의지해 사는 힘없는 벌레들을 감싸고, 저온에 시달리는 지표를 감싼다. 그리고는 헐벗은 몸으로 겨울과 정면으로 마주 선다. 사람들은 그런 나무의 생사를 의심한다. 그러나 냉혹한 추위에 이미 동사했으리라 체념하는 그 순간 나무들은 반전의 명수들처럼 봄과 함께 춤추며 초록으로 되살아난다. 이것은 분명 타자를 위한 헌신이며 기적이다. 나무는 이런 기적을 매년 우리들의 눈앞에 실현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평생을 살아가며 몇 번의 기적을 스스로 이루어 내는가. 어떤 이는 단조로운 신념 하나로 평생을 산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이는 수시로 자신을 변모시키며 살기도 한다. 나는 나를 변모시키기 위해 몇 번의 절체절명한 기적을 꿈꾸었는가.


 

 

은행나무 곁을 떠나 다시 산을 오른다. 며칠 뒤면 은행나무는 이 화려한 빛깔의 나뭇잎마저 모두 버릴 테다. 그리고 빈 가지로 유유히 겨울 휘파람을 불고 있을 테다. 나무의 지극히 높고 아름다운 신념을 배우고 싶다.

 

 

<교차로신문 2013년 11월 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