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 연재 칼럼

가을에 듣는 트럼펫 소리

권영상 2014. 10. 10. 13:38

 

 

가을에 듣는 트럼펫 소리 

권영상

 

 

 

화요일 오후, 베란다에 나가 하늘을 본다. 추운 날 끝의 하늘이라 그런지 파랗다. 눈이 어리다. 아파트 마당에 나왔다. 마당엔 사람 하나 없다. 맨드라미만 붉게 피고 있다. 차를 몰고 주말농장으로 향한다. 양재역을 지나고 원터골을 지나다 청계골 입구에서 차를 멈추었다.

 


청계산이 자꾸 나를 잡아당긴다. 붉게 물든 소로를 따라 산길을 오른다. 참나무숲 사이로 잘 익은 가을볕이 소낙비처럼 쏟아진다. 그 볕에 들어서다가 나서다가 하면서 반쯤 올랐다. 싸리나무에 둘러싸인 오래 묵은 샘터가 나온다. 샘에서 또록또록 맑은 샘물이 떨어진다. 칡잎을 따 컵을 만들어 한 모금 채워 마신다.

 


그때, 어디선가 트럼펫 소리가 난다. 원터골 쪽 산언덕이다. 깊다면 깊은 이 산중에서 난데없이 울려나오는 트럼펫 소리가 가을 하늘처럼 눈부시다.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뿜은 담배연기처럼.”
칡잎에 또록또록 떨어지는 샘물을 채우며 트럼펫을 듣는다. 아는 노래다. “작기만한 내 기억 속에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나는 물끄러미 칡잎에 떨어지는 샘물을 바라본다. 손가락이 다 젖도록 채운 샘물을 고개를 젖혀 꿀꺽 마신다. 그때 내 눈에 보이던 목 마르도록 파란 하늘. 나는 내 목숨이라는 컵에 무엇을 채우느라 여기까지 힘들여 달려왔을까. 샘물을 채워 마시던 칡잎을 발앞에 버린다.


 

돌로 된 벤치에 다리를 꼬고 걸터앉는다. 누가 부는지 그 날카로운 금속성 소리가 끊겼다 이어졌다 한다. 그 화려한 음색 속에 외로움이 은은히 배어있다. 나는 괜히 그 소리의 마법에 빠져든다. 소리가 끊기면 궁금하다. 일어나 소리가 날아오는 방향을 본다. 마을 쪽으로 내리달리던 산등성이가 뚝 끊긴 언덕이다. 능성이의 나무빛깔이 까칠하다.

 


“저 사람도 나처럼 외로운가 보다.”
나도 외로움에 떨던 때가 더러 있었다. 그 때마다 나는 외로움을 참아내려고만 했다. 생각해 보니 산에 올라와 트럼펫을 부는 사람처럼 그렇게 외로움을 소리쳐 본 적이 없다. 그저 내가 아는 술로 나를 어르고 달래고 추스르고 말았다. 나는 나를 위해 적극적이지 않았으니까. ‘세상 다 그런 거지 뭐’ 라거나 ‘스치고 지나가는 한 때의 사소한 감정이지’ 그러며 그저 나를 잠재우기에 급급했다.
트럼펫을 포켓에 넣어 이 산중까지 짊어지고 온 그 사람에겐 어떤 외로움이 있을까. 세상을 향해 그렇게 소리쳐 불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아픔이 있다면 그건 어떤 아픔일까. 이 산중에 와 만나게 된 트럼펫의 외로움을 내가 겪는다. 늘 내게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먼 길을 걸어 나는 여기까지 왔다.


 

지나가는 바람결에 노란 나뭇잎 하나 슬쩍 떨어진다. 다가가 보니 생강나무 노란 잎이다. 이미 작은 바람에도 생강나무 잎이 힘없이 질 때다. 산을 다 내려와 내가 걸어내려온 청계산을 올려다 본다. 내가 걸어오르고 걸어내린 아무 흔적도 없다. 산은 그저 꾹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다.

 

(교차로신문 2013년 10월 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