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 연재 칼럼

찌르레기에 대한 지극 정성

권영상 2014. 9. 18. 10:31

 

 

 

찌르레기에 대한 지극 정성

권영상

 

 

 

창틀에 페인트 칠을 하러 안성 집에 내려왔다. 칠을 하기 전에 먼저 할 일이 있다. 창틀의 낡은 페인트를 벗겨내는 일이다. 칠을 한지 3년이 됐는데 보기 흉할 만큼 벗겨졌다. 나는 세모칼로 낡은 칠을 벗기다가 벌집을 만났다. 이층 다락방 처마 안쪽이다. 말벌집이다.  

 


말벌은 사람 왕래가 적은 우리 집 처마 끝에 살 집을 정했다. 숲에서 보던 큰 벌집과 달리 작다. 하나도 아니고 세 개나 매달렸다. 나는 아무 생각없이 세모칼로 벌집 하나를 떼어냈다. 벌집을 위험한 폭탄으로 생각한 거다. 쏘이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그러니 아예 근원을 없애자는 사람 중심 생각이 내 손에 작용한 것 같다. 나는 다음 칸의 벌집도 떼러내려 세모칼을 들이대다가 얼른 멈추었다.   

 


‘함께 살러온 벌들을 매정하게 내쫓으면 될까?’
그 생각이 슬며시 들었다. 사람과 달리 바람 부는 이층 처마 끝이 그들에게는 살만한 곳일지도 모른다. 사람 사는 집을 무서워하지 않는 그들이 기특하고, 그들의 작은 원뿔모양의 집 또한 예술성이 있어 보기 좋다. 그들이 이유없이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면 굳이 말벌집을 떼어낼 이유가 없다. 
사람을 크게 경계하지 않는 것으로 작은 새들이 있다.

 


벚꽃이 지고 볕이 고와가던 올 봄이다.
전화를 하고 강릉 고향집에 내려갔다. 고향집 큰조카는 내가 집에 들어서는 때를 맞추어 창밖에 얼굴을 뾰족이 내밀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마당에 들어서자, 잠깐만 기다려달라는 거다. 웬일이냐니까 지금 현관에 찌르레기가 들어와 알을 품고 있단다.

 


나는 거실로 들어가는 현관문을 봤다. 반쯤 열린 채 있다. 한동안 찌르레기 때문에 나는 집안에 들어서지도 못한 채 바람 부는 창턱에 매달려 조카랑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야기가 끝나갈 때쯤이다. 찌르레기 한 마리가 깝죽대며 현관을 나오더니 담장 너머로 날아간다.

 


“이제 들어오게.”
그제야 방을 빙 돌아 거실문을 열고 조카가 나왔다. 
현관에 들어서자, 조카가 현관 신발장 위에 놓인 일하러 다니는 제 등산화 속을 가리켰다. 그 속에 지푸라기로 둥지를 틀고 낳은 뽀얀 알 네 개가 보였다. 찌르레기가 사람 사는 집안에 들락이는 걸 더러 텔레비전에서 보기는 했지만 놀라웠다. 다른 곳도 아닌 등산화 속에 둥지를 틀다니. 등산화 씻어 말린 걸 신발장 위에 올려놓았는데 언제 보니 그 속에 둥지가 있더란다. 그 탓에 농원에 일을 하러 다니는 조카는 등산화를 못 신고 운동화를 신고 다닌단다. 거기다 바람이 불어도 찌르레기 때문에 문을 닫을 수 없어 매양 열어놓곤 산단다.

 


“참, 지극 정성이네.”
나는 웃으며 한 마디했다. 다섯 식구가 찌르레기 때문에 찬바람을 맞다니 지극정성일밖에. 그걸 보고 왔으면서도 나는 아무 생각없이 말벌집을 떼어내 버렸다. 쏘이면 크게 다친다, 그러니 근원을 없애자는 생각도 어찌보면 자연에 대한 지극정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교차로 신문 2013년10월 0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