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 연재 칼럼

버스커버스커, 수채화 같이 가벼운 도시의 사랑

권영상 2014. 10. 10. 13:33

버스커버스커, 수채화 같이 가벼운 도시의 사랑 

권영상

 

 

 

눈부신 오후의 창문을 열 때 커튼자락이 바람과 함께 내 얼굴을 휩싼다. 그러고는 또 언제 그랬냐 싶게 슬그머니 제 자리로 돌아갈 때 내 눈에 보이던 파란 하늘. 그 하늘에 제트비행기가 긋고 간 하얀 금처럼 선명히 마음에 남는 노래.
버스커버스커의 “처음엔 사랑이란 게”가 그렇다. 수채화 같이 가벼운 도시의 사랑! 이 노래를 한 마디로 그렇게 말해도 될까. 

 

 


보컬 그룹 버스커버스커가 지난 달 25일 1년 6개월이라는 긴 공백 이후, 두 번째 앨범을 냈다. 음원차트마다 1위를 석권하고 있단다. 더욱 놀라운 건 1위에서 9위까지가 모두 2집 앨범에 수록된 곡이라니 버스커버스커의 수채화풍의 위력을 알만하다.

 

 

 

“나에게 사랑이란 게 또다시 올 수 있다면.”
아파트 계단을 걸어 내려올 때다. 위층에서 누군가 나처럼 계단을 걸어 내려오며 장범준 특유의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나도 그 쉽고도 가벼운 노래에 맞추어 1층까지 내려왔다. 목소리도 내 뒤를 따라 내려와선 나와는 반대 방향으로 나간다. 돌아다 봤다. 청바지에 하얀 남방을 입은 청년이다. 스무 살은 될까. 휴일 오후, 애인을 만나러 가는 걸까.

 

 

 

“벤치에 앉아있는 그녀 모습 속에는

오, 난 그 어떤 그리움도 찾아볼 순 없군요.

벤치에 들려오는 그녀 웃음 속에는

오, 난 그 어떤 외로움도 찾아볼 순 없군요.”

이 노래의 배경엔 모던한 도시의 거리가 있다.
가로수 아래 벤치에 앉아 있는 ‘그녀’에겐 그 어떤 그리움도, 외로움도 없다. 어쩌면 그런 감정 따위는 더 이상 필요 없다. 근심 걱정 없는 산뜻한 그녀면 된다. 억지 꾸밈도 필요 없다. 그냥 수채물감 빛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거리의 벤치에 쿨하게 다리를 꼬고 앉으면 족하다. 굳이 취업용 수험서를 끼고 있지 않아도 되고, 빈티를 보이지 않기 위해 정장을 갖추어 입을 이유도 없다. 그녀는 도시의 외벽처럼 그냥 산뜻한 그녀면 된다.

 

 

30대에겐 직장이 없고, 40대에겐 '나'가 없다는 말이 있다. 미래는 있되 미래가 없는 세대가 20대란다. 힘들게 대학은 나왔으되 취업에 도움이 안 되고, 죽어라 입사원서를 써보지만 족족 떨어진다. 비싼 등록금과 성형수술비로 날마다 카드빚에 쪼들려 사는 게 불행한 20대다. 나날이 살아있다는 게 사치스럽고, 도무지 행복할 것 같지 않은 게 그들이다. 그러고 보면 그들이 왜 이 가볍고 쿨한 버스커버스커에 매료되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사랑을 하기엔 쿨한 여자와 바보 같은 남자가 좋다. 어차피 직장 없고, 멋진 승용차 못 가질 바에야 잔머리 굴리는 상대는 싫다. 현실에서도 골치 아픈데 사랑에까지 머리 굴리는 건 죽음이다. 도시의 사랑은 카톡에 날아오는 문자처럼 가볍게 만나 가을 물빛 같이 속삭이다 산뜻하게 작별하는 것일수록 좋다. 그게 "처음엔 사랑이란 게"가 꿈꾸는 요즘 도시의 사랑이 아닐까 싶다.

 

 


나이 먹은 내게도 버스커버스커의 단조롭고도 가벼운 노래가 좋다. 무거운 영화보다, 무거운 책보다, 어차피 우리들의 인생에 무게를 느낀다면 가을하늘 같이 스치듯 가벼운 노래가 좋다. 가을 들판에 코스모스가 제격이듯.

 

(교차로신문 2013년 10월 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