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 연재 칼럼

너의 용기가 부러울 뿐이다

권영상 2014. 8. 14. 11:12

너의 용기가 부러울 뿐이다

권영상

 

 

 

 

“선생님, 이사 잘 하셨어요?”
안성에 이삿짐을 옮겨놓고 짐 정리를 하고 있을 때다. 전화가 왔다. 받고 보니 가끔씩 안부전화를 해 주는 마흔 살 가까운 제자다.
“이사는 잘 했네만, 김군은 지금 어디 있나?”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언젠가 내게 보낸 메일에 직장을 그만 두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외국에 나가 그림공부를 하고 돌아와 디자인 업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런 그가 그림에서 완전히 손을 뗄 수 없다며 선배 회사와 통합을 했다. 잘은 모르겠으나 어려움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선생님, 먹고 살기 위해 자유를 포기한다면 그건 변명이겠지요?”
얼마 전, 문자 한 통을 내게 보내고 그는 내내 감감무소식이었다. 나는 속으로 제발 직장만은 움켜쥐기를 바랐다. 
“저, 직장 그만 두고 지금 낙산해수욕장에 와 있습니다. 홀가분한 게 참 좋습니다.”
기어이 직장을 그만 둔 모양이다. 그의 목소리가 싱그럽다. 아침 일찍 낙산사에 올라 일출을 보고, 절의 벽면에 그려진 심우도를 보면서 자신의 소를 찾고 있는 중이라 했다.

 

 

“자네의 용기가 부러울 뿐이네.”
대뜸 내 입에서 그 말이 나왔다. 직장을 그만 둔다는 건 위험하다. 평생 직장에 매달려 월급쟁이로 살아온 내게는 더욱 그렇다. 20대에 직장에 발을 디딘 이래 나는 한 번도 직장을 그만 둘 생각을 못했다. 당연히 직장에 의지해 사는 걸로만 알았다. 먹고 살기 위해 직장에 매달렸고, 내 집 한 칸 얻느라 빌린 대출금 때문에 직장을 버릴 생각을 못했다. 자식을 낳아 공부를 시키는 일도 나를 직장에 매달리게 했다. 

 

 

나는 나를 위해 무엇을 바쳤는가.
하루의 절반을 직장에 바치면서도 정작 나는 나를 위해 이렇다하게 해 준 게 없다. 내게 애정을 보인 적도 없고, 변변한 관심조차 가져준 적도 없다. 단지 가족을 위한다는 핑계로 나를 외면하며 살았다. 직장에 매달리는 일이 당연한 미덕인 것처럼 30여년을 쉬지 않고 버스와 전철로 출퇴근을 했다. 그러기에 직장을 팽개치고 동해안이나 지리산으로 달려가 잠시 나를 쉬게 해줄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이쯤 와 생각해 보니 나의 지난 인생살이가 그리 아름답지 못하다. 좋은 기억보다 고단한 기억뿐이다. 그 사이 내 몸은 수리가 필요한 수레가 되었고, 영혼은 혼탁해졌다. 청년시절에 꿈꾸었던 아름다운 꿈은 모두 어디로 가버렸는지......
“길이 보일 때까지 여기 눌러있다가 올라갈 겁니다.”
김군이 파랗게 펼쳐지는 바다를 바라보며 지금 전화를 하고 있다고 그랬다. 그의 목소리에 지친 기색보다 오히려 왕성한 의욕이 엿보인다. 통화를 마치고 다시 짐 정리를 시작했다. 자신을 위해서라면 직장도 던질 줄 아는, 청년다운 그의 인생이 새삼 부러울 뿐이다. 

 

(교차로신문 2013년 9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