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 연재 칼럼

참호에서 잠을 자는 여인

권영상 2014. 7. 16. 13:50

 

참호에서 잠을 자는 여인 

권영상

 

 

 

 

아침에 동네 우면산을 오른다. 장마중이라 우중충한 하늘에서 가늘게 비가 내린다. 나는 우산 없이 일부러 비를 맞는다. 온몸으로 하늘을 받아내는 일 같아 비 맞는 일이 좋다.
소나무숲 사이로 난 산비탈 길을 오를 때다. 누군가 어둑한 숲길을 타고 내 앞에 바짝 다가왔다. 순간 섬뜩했다. 손으로 비를 가린, 검정옷을 입은 마흔 중반의 여인이다. 언젠가 한번 본 기억이 있다. 그녀가 천천히 내 곁을 지나간다. 나는 대여섯 걸음을 더 가서는 그녀를 돌아다 봤다. 비탈길을 걸어 내려가 값싼 허기를 채우고 돌아올 모양이다.

 

 

눈이 녹아가던 지난 겨울에도 나는 그녀를 보았다. 그때도 나는 이 소나무 숲길을 오르고 있었다. 소나무 숲이 끝나는 지점에 약간 평평한 길이 한 자락 놓여있다. 그쯤에 눈을 밟고 서서 간단히 몸을 풀고 있을 때다.
“바삭! 바삭!”
난데없이 등 뒤에서 눈 밟는 소리가 났다.
놀란 나는 운동을 멈추고 휙 돌아다 봤다. 시커먼 곰 한 마리가 내 등 뒤에 다가왔다. 그것은 곰이 아니라 낡은 검정외투를 끼어입고 또 끼어입어 덩치가 산만한 여인이었다. 놀란 내 표정이 미안했던지 여인이 방향을 틀었다. 그러느라 여인이 그만 눈 위에 넘어졌다. 옷의 무게 때문에 일어나지 못하고 버르적댔다. 나는 얼른 그 곁을 떠났다. 산을 오르다 보니 그녀가 천천히 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쪽 참호에 여자가 살아요.”
언젠가 이 길을 오를 때 산에서 몇 번 만난 적 있는 분이 내게 말했었다. 정말이지 몇 걸음 더 가자, 오리나무 사이로 좀 전의 그녀가 걸어온 발자국이 자박자박 눈 위에 찍혀 있었다. 눈 그친 이후로 처음 걸어나온 모양이었다. 나는 우두커니 그녀가 걸어나온 길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이다. 그 길을 따라가면 이 산중에서 가끔 보던 참호가 나오겠다. 한 때 시멘트로 만들어놓은, 출입문도 창문도 없는, 버려진 참호. 그곳이 그 여인이 삼동을 나는 집인 셈이다. 

 

 

 

지난 겨울은 유난히 춥고 눈이 많았다. 그 혹한의 겨울을 나느라 그녀는 어디선가 구한 검정외투를 끼어입고, 또 끼어입었을 것이다. 빛 한 점 없는 칠흑의 산중에서 이 거대한 산이 만들어내는 두려움과 홀로 싸우며 또 살아냈을 것이다.
나는 남부순환도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길 건너에 하늘을 찌를 듯 서 있는 부유한 고층아파트와 밀림 같은 빌딩숲, 그리고 넓은 도로를 질주하는 승용차들이 보인다. 그녀는 참호에 난 작은 구멍으로 자본주의의 도시가 내뿜는 이 번쩍이는 문명들과 마주 했을 것이다. 그녀는 거기에서 무얼 보았을까? 우리가 훈훈한 거실에서 음악을 들으며 커피 향을 즐길 때 그녀는 언 손을 부비며 차가운 눈물을 떨구고 있었을지 모른다.
나는 비를 맞으며 사치스럽게 산을 오르는데, 그녀는 그 비가 싫다. 무성한 숲을 한번 둘러본다. 위대하다. 인간이 껴안지 못하는 그녀를 산이 껴안는다.          

 

(교차로 신문 2013년 3월 1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