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지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권영상
집 전화기 옆에는 여전히 전화번호 수첩이 있다. 식구마다 휴대폰이 있는데도 버릴 수 없는 유물처럼 그대로 두고 쓴다. 자주 연락하는 전화번호는 휴대폰 속에 있지만 오랜만에 한번씩 하는 이들의 번호는 여전히 전화번호 수첩 속에 있다.
안성 가는 길에 이천 사시는 은사님을 뵙고 싶어 전화번호 수첩을 꺼내들었다. 너저분하다. 지워버린 전화번호며 이미 바뀐 번호, 적을 곳이 부족해 길게 줄을 당겨 여기저기 적어놓은 번호들, 그도 모자라 쉬운 대로 전화번호와 주소를 적어붙인 여러 장의 포스트잇들.
전화번호 수첩을 보니 얼핏 10년은 된 듯하다. 그 무렵 우리는 겨울이면 난방 때문에 경유를 썼는데 그때 받은 두툼하고 탄탄한 수첩이다. 그 시절엔 새 전화번호 수첩을 얻으면 새해마다 전화번호를 정리했다. 나와 아내의 직장 전화, 고향의 집안 사람들, 아내의 집안 식구, 제자들, 친구들, 학교 은사님들, 촌수는 좀 멀지만 가까이 지내던 일가분들, 그리고 동네 가게, 약국, 병원, 신문지사, 세탁소 등의 전화번호를 컴퓨터로 쳐서 붙였다.
나는 그걸 남편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전화를 할 때마다 전화번호 찾는 일은 너무도 번거롭고 불편하다. 그러니까 편리하자고 해마다 전화번호 수첩을 가지런히 정리했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뒤에 펼쳐보는 수첩은 잡초로 뒤엉킨 묵정밭처럼 번호를 찾아내는 일이 불편했다. 나는 지우고, 고쳐쓰고, 포스트잇을 붙인 수첩을 뒤적이다 간신히 이천에 계신 은사님댁 전화번호를 찾아냈다. 그쪽으로 전화를 걸었다. 한참만에 사모님인지 여자분이 받았다. 나는 은사님의 존함을 댔다.
“잘못 걸렸네요.”
여자분이 수화기를 놓았다. 새로 이사 왔다는 거다. 그러고 보니 안부전화를 드린게 엊그제 같았는데 6년은 더 된 듯하다. 그동안 나는 직장에 매여 먹고 사느라 가까이 했던 사람들을 다 잊고 살았다. 나도 퇴직을 했으니 내 인생의 항해도 오래 됐다.
언젠가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닻을 올리고 인생의 항해를 처음 시작할 때는 무거운 짐들을 다 싣는다. 의리, 우정, 꿈, 욕망, 사랑, 종교, 우애, 효도..... 그러나 대양에서 풍랑을 만나면 그 때마다 배를 살리기 위해 그들 짐을 하나씩 바다에 던진다. 그리하여 인생의 마지막 항구에 도착했을 때, 그때 당신의 선상에 끝까지 남아있는 짐은 무엇인가?”
나는 내 선상에 남아있는 짐을 살피듯 전화번호 수첩을 다시 한장 한장 넘겼다. 그 속에는 이미 세상을 뜬 사람들도 있고, 이혼을 하여 남남이 된 사람도 있다. 그리고 이름과 전화번호는 깨끗히 적혀 있으되 연락을 주고받은 적 없는 이들이 있다. 한때 교류하던 친구들이다. 스승의 날에나 한 번씩 인사를 드리던 은사님, 의기투합하던 직장 동료들, 촌수가 먼 친척, 공부 욕심을 부리던 대학원 전화, 그리고 동네 가게들....
나는 그동안을 살아오면서 풍랑에 짐을 버리듯 그들을 한 사람 한 사람씩 잊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그들을 잊었듯 나는 또 누군가의 수첩에서 잊혀진 사람이 되고 있을지 모르겠다. 지금 ‘그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야겠다. 그에게 잊혀지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교차로 신문 2013년 7월 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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