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 연재 칼럼

‘바다가 보고 싶었다’는 어느 탈주자의 말

권영상 2014. 5. 24. 21:18

‘바다가 보고 싶었다’는 어느 탈주자의 말

권영상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사건이 있었다. 검사의 조사를 받던 범인이 수갑을 찬 채 조사실을 탈출한 사건이다. 그를 붙잡기 위해 전국의 경찰이 동원되었고, 언론에 그의 얼굴이 공개됐다.
절도 전과 12범. 뭘 훔쳤는지 모르지만 남의 것을 훔치는 일은 범법이다. 어떻든지 그는 법의 심판을 받고 죄의 댓가를 달게 받아야 옳다.

그러나 그에 관한 뉴스를 볼 때마다 뭔가 마음 한 켠에 좀 안 됐다는 생각이 일었다. 하도 사람 목숨을 다치게 하는 이들이 많은 세상을 살아 그런가. 아니면 절도범이라는 말 속에 숨어 있는 장발장 때문일까.


 

 

어쨌거나 그는 다행히 잡혔다. 탈주한 이유가 뭐냐는 질문에 그는 ‘징역을 살기 싫었다.’고 대답했다. 죄수 두 명을 맞아 싸워도 이길 만큼 힘이 좋은 그에게 교도소 생활은 힘들기도 했겠다. 징역 살기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만 큰 덩치에 비해 그에겐 그런 솔직함이 있어보였다.


 

 

그 이튿날이었다.

그에 대한 기사가 또 신문에 나왔다. 부산에서 발각되어 울산으로 도주해놓고 경찰 수색이 한창인 부산으로 다시 돌아온 이유가 뭐냐는 물음에 그는 또 이렇게 대답했다.

“바다가 보고 싶었다.”
그러니까 그는 잡힐 걸 뻔히 알면서 바다가 가까운 부산에 머물고 싶어한 것이다. 바다야 울산에도 있지만 울산이라고 다 바다가 아니다. 그의 머릿속 ‘바다’란 부산이다. 바다는 사람이 접근할 수 있는 마지막 지점이며 모든 것을 용서해주는 어머니다. 꼭 바다를 보기 위해 부산에 돌아왔다기보다 어머니 곁에서 이 사건을 종결짓겠다는 말로 들렸다. 물론 그의 말 대로 지칠 대로 지쳤고, 모든 걸 포기한 상태에서 한 말이겠지만 ‘바다가 보고 싶었다’는 그 말은 전과 12범의 입에서 나온 말 같지 않게 매우 인간적이었다. 절망의 끝에서 발견한 일말의 회한이랄까.
살다 보면 누구나 지친다. 어떤 삶을 살아가건 살아있는한 사람은 상처받고 그래서 누군가로부터 위안받을 필요가 있다. 남을 속이고, 나를 속이고, 남에게 나를 과장하고, 경쟁이라는 이름으로 남을 제치고 살자면 누구나 안으로 상처를 받는다.

 

 


나는 바다가 가까운 마을에서 살았다.
가끔 해수욕철이 지난 뒤 바다에 나가면 아무도 찾지 않는 모랫벌을 홀로 걷는 이들이 있다. 바람 불고, 때로는 비 오고, 파도가 머리 위까지 날아오르는 그런 바닷길을 쓸쓸히 걷는 이들을 볼 때면 나는 ‘싱거운 사람들!’ 그랬다. 그러나 험한 바다와 마주 하지 않고서는 아픔을 견뎌낼 수 없다면 그에겐 상처가 많다. 그들은 지상의 마지막 끝에 서서 바다의 위안을 받으며 상처 많은 자신을 살려낸다.
교도소가 ‘징역살기 싫은’곳이 아니라 마음의 상처를 회복하고 새로운 사람으로 돌아나올 수 있는 ‘바다’와 같은 곳이 될 수는 없을까.

 

<교차로신문 2013년 6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