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 연재 칼럼

찬비가 내리는 이 밤

권영상 2014. 12. 24. 16:59

찬비가 내리는 이 밤 

권영상

 

 

 

 

밤 10시쯤부터 비가 왔습니다.
나는 농촌 사람들처럼 불을 끄고 일찍 잠자리에 누웠습니다. 낮에 집 둘레를 청소했더니 몸이 힘들었나 봅니다. 눈을 감자, 깜깜한 창문 너머에서 빗소리가 살아나 방안으로 기어들어 옵니다. 어두워 그렇겠지요? 밤비는 수돗가의 물그릇을 두드려 보고, 상추를 덮어놓은 비닐로 달려가선 그걸 또 통통통 두드리나 봅니다. 유리창문을 두드리고, 자동차 지붕을 두드립니다. 깜깜한 밤이니 뭐가 한눈에 제대로 보이지 않겠지요. 이것저것 두드리며 뭐가 어디에 놓여있는지를 살피나 봅니다. 이번에는 다락방 처마에 걸어놓은 풍경을 두드려보는 모양입니다. 풍경소리가 쟁그렁, 납니다.

 


대지만큼 낮은 뜰방에 누워 지상을 울리며 지나가는 빗소리를 듣습니다. 괜히 가슴이 설렙니다. 빗소리에 진한 흙내가 묻어있는 듯하고, 첫눈의 숨결이 배어있는 듯 해 잠이 오지 않습니다. 잔다고 일찍 자리에 누웠는데, 어디서 또 황소 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요기 길 건너 최씨 아저씨네 황소인 듯 합니다. 아까 저녁때도 몇 번 울었습니다. 바깥 날씨가 무척 춥습니다. 외양간이 춥고, 등허리가 시려서 우는 게 아닐까요.

 


잠이 다 깨었습니다. 내 귀가 온통 빗소리에 가 있습니다. 나이 스무 살도 아닌, 어지간히 인생을 살아본 내가 이깟 빗소리에 잠을 못 자다니요. 어쩌면 빗방울 하나 떨어지는 소리에도 생각이 많아지는 나이에 와 있는가 봅니다. 세상의 것에는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다 제 삶의 무게가 있습지요. 그것이 어찌하다 무게의 한계를 어기면 저 자신을 툭 놓치게 됩니다. 빗방울도 그렇게 해서 여기로 떨어져 내려오는 그 목숨의 무게가 아닐까요.

 


이 비가 강원도 어느 산간지방에서는 눈이 되어 내린다고도 했습니다.
여기 이불 속에 누워 어느 산비탈을 향해 사선을 긋듯 내리는 그쪽의 눈을 생각합니다. 눈은 나뭇가지에 붙어있는 마른 나뭇잎을 사각사각 두드리며 내리겠지요. 그 때 그쪽 어느 깊은 산비탈 바위굴에 엎드려 잠을 청하던 산짐승이 그 눈 소리를 듣고 있겠지요. 그러다가도 너무 너무 잠이 안 오면 슬며시 일어나 바깥에 내리는 눈을 내다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이곳의, 밤이 추운 황소처럼 한번 울어도 보겠지요.

“우우우우…….”
눈 내리는 밤이면 산짐승들도 생각이 많아지겠지요. 그들도 해마다 찾아오는 겨울 절기와 우주의 냉랭한 기운을 모를 리 없을 테니까요. 밥을 먹고 육신을 거두며 살아내야하는 산짐승들에겐 이 냉혹한 밤이 잠이 안 오는 밤이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밤이 알 수 없는 깊은 시간 속으로 나를 이끌고 가나 봅니다. 이 시각, 하늘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의 일은 나와 무슨 인연이 있는지, 안 하던 생각을 자꾸 하게 됩니다. 선인들은 그런 일일랑은 알려고 하지 말라 했습니다. 그냥 그런 이치 속에 내가 있다는 것을 마음에 늘 품고 살라고만 했지요.
밤이 자꾸 깊어가네요. 구름 속에 갇혀 보이지 않는 수많은 별들도 그리고 이 밤도 모두 안녕히 주무십시오.

 

<교차로신문 2013년 11월 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