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풍경소리

권영상 2015. 1. 30. 11:13

풍경소리

권영상

 

 

 

 

 

아침 자리에서 일어나면 내 몸이 베란다로 나가려는 충동을 느낀다. 잠들었던 정신을 깨워주는 깨끗하고 서늘한 공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커튼을 열고 조용히 문을 연다. 베란다에 놓인 화분들이 밤새 만들어낸 식전 공기가 훅 내 몸 안으로 밀려온다. 그와 동시에 내 정수리 위에서 맑게 치는 풍경소리. 쟁그렁.

쟁그렁!

풍경 소리가 정수리 위에서 난다. 들판 생눈 위로 쏟아지는 눈부신 아침빛 같이 서늘하게 내 뇌리를 친다. 일순 흐릿하던 정신이 잠에서 맑은 현실로 돌아온다.

 

 

 

우리 집에 풍경이 있다.

5월, 세상천지의 철쭉이 한창 무르익도록 피고 있을 때다. 나는 5월의 힘에 못 이겨 치악산으로 달려가 사다리병창길을 올랐다. 철쭉꽃은 무르익을 대로 너무 무르익어 사다리길 위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툭툭 떨어졌다. 얼마나 느릿느릿 둔탁하게 떨어지는지 나꾸어챈다면 꽃은 두고 꽃그림자만이라도 서너 말은 나꿀 만큼 철쭉이 절정이었다. 나는 치악산 1288미터를 다 오르고 난 후에도 그 길의 고운 봄날이 잊힐까 두려워 되짚어 내려왔다. 떨어진 꽃이 자꾸 발에 밟혔다. 신발을 벗고 꽃을 피하며 내려오다가 구룡사 큰절 매점에서 풍경을 하나 샀다. 그날 하루 속절없이 내 발에 밟힌 철쭉꽃값을 어디다 치룰 길이 없어 그 절에 꽃값을 내고 풍경을 들고온 거다.

 

 

 

 

사는 곳이 도시 속의 속진한 아파트다. 나는 풍경을 달아둘 데가 없어 그만 서랍 속에 넣어두고 있었다. 그렇게 살던 어느 날, 꺼내어 달아놓는다고 한 자리가 베란다로 나가는 문틀 위다. 문을 여닫을 때마다 문과 스치듯 부딪히는 그 지점에다 풍경을 매달아놓았다. 이렇게 하여 나는 아침저녁으로 풍경소리를 저절로 듣는다. 나의 궁리라는 것이 참으로 기특하고 신통할 뿐이다.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와 내 정수리 위에서 쟁그렁, 울던 풍경을 본다.

저것의 본디 고향은 산중 고적한 절간의 추녀 끝이다. 추녀란 머리를 치켜들고 무한한 우주로 향하려 하는 날렵한 비상의 자리다. 그 아찔한 자리에 매달려 세상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을 기다리는 것이 바로 요만만 하게 생긴 금속 풍경이다. 마음이 아픈 것은 절간에 사는 풍경에 붕어 한 놈을 매달아 놓은 까닭이다. 지독한 아이러니다. 산 목숨 다치는 일을 멀리하는 곳이 절간이다. 그런데 그런 절간에서 물을 떠나면 한 시라도 생존할 수 없는 비린 수중 생물을 오히려 그 높은 허공에 매달아놓다니! 이거야말로 얼마나 발칙하거나 때로는 번득, 하는 아이러니인가.

 

 

 

 

어찌 보면 사람이나 붕어나 그가 머물러 있는 곳이 바람 많은 외로운 벼랑 끝이기는 마찬가지다. 풍경은 거기에서 한 줄기 바람을 기다리며 산다. 세상 풍파에 시달리며 사람이 살아내듯 풍경도 그렇다. 바람이 와야 풍경도 산다. 그러지 않고는 그는 한 쇳덩이에 불과하다. 그게 허공에 매달려 사는 붕어의 아픔이다. 그게 붕어가 사는 고통이며, 붕어가 피하지 못하는 업이며, 매일매일 붕어가 처한 현실이다.

지중해를 끼고사는 고대인들의 지역에도 풍경은 있었던 모양이다. 그 당시 그 시절을 살던 지중해 사람들에게 있어 풍경소리는 자비심을 일깨우는 소리였다고 한다. 풍경소리를 들을 때마다 이 세상을 고단히 사는 또 누군가가 생각나고, 그에게 연민과 함께 마음에 잠들어있는 자비의 눈을 뜨게 하는 일, 그 일을 풍경이 했을 것이다.

 

 

 

 

붕어 한 마리가 물을 떠나 목마른 처마 끝에 와 있다. 그 일 자체가 곧 연민이다. 그 일 자체가 곧 고단한 삶을 사는 우리 인생의 비유이며, 인생을 사유하게 하는 단초다. 붕어는 바람을 안고 사는 모든 목숨들을 대신해 거기 있다. 남의 목숨을 약탈하지 않고는 한 시도 살아갈 수 없는 수많은 승자들을 위한 속죄물이다. 그가 풍경에 매여사는 붕어라면 지나친 오해일까.

 

 

 

 

남한산성 동문쯤에 놓여있는 장경사도 오래된 고찰이다.

나는 가끔 이 세상 표현으로 ‘할일이 없을 때’면 그 댁 마당 늘근 은행나무 밑에 앉아 놀기를 즐긴다. 은행나무 푸른 그늘의 축복을 누리거나, 장독대 장독에서 빛나는 오후의 쏘는 듯 한 햇빛을 즐기거나, 붉은 작약꽃에 눈이 멀어 세상 일을 잊는 즐거움을 누린다. 그럴 때에 고요한 바람 한 줄기에 쟁그렁, 풍경이 운다.

사위가 갑작스러이 고적에 빠진다. 은행나무며 작약이며 절간 마당이 고적해진다. 그 배경에 풍경이 있다. 풍경은 그 누군가의 배경이 되길 원한다. 절이 절답게, 탑이 탑답게, 늘근 은행나무가 은행나무답게, 산이 산답게 하는 배경에 풍경이 있다. 그래서 산사는 늘 고요하고 그윽한 운치에 젖는다.

나도 불현 그 누군가의 배경이 되고 싶다.

 

 

 

베란다로 나가는 문을 닫았다가 다시 연다.

풍경이 운다.

붕어의 수고로움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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