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이 빠진 밥그릇

권영상 2015. 1. 24. 11:55

이 빠진 밥그릇

권영상

 

 

 

 

화분에 물을 주려고 베란다에 나갔다. 난 화분 옆에 밥그릇이 하나가 놓여있다. 멀쩡한 밥그릇을 아내가 베란다에 내놓을 리 없다. 이라도 빠진 모양이다. 화분에 물을 주고 내놓은 밥그릇을 집어 들었다. 깨어진 곳이라곤 없다. 다른 일로 밥그릇을 들고 나왔다가 그냥 두고 간 건가 했는데 아니다. 껍질이 벗겨지듯 떨어져나간 자국이 있다. 흰색사기 그릇이라 햇빛에 선뜻 보이지 않는다.

어디에다 이 빠진 밥그릇을 놓아줄까 궁리를 하며 여기저기 살폈다. 마침 있다. 창가에서 꽃이 피고 있는 제라늄 화분이다. 그 화분의 물 받침을 해주었다. 진분홍빛 제라늄 꽃과 웅숭깊은 흰 밥그릇 받침, 크게 흉하지 않다.

 

 

 

고향 어머니셨다면 밥그릇은 굴러다니는 도토리나 알밤을 주워 담는 그릇으로 쓰셨을 것이다. 아니면 수돗가 빨랫비누 그릇으로 쓰시든가. 혹 아버지 눈에 띄셨다면 헌 못 그릇이 되었을지 모른다. 이래저래 농촌의 부엌에서 나온 이 빠진 그릇은 쓰일 데가 많다. 밥그릇은 밥그릇으로의 임무가 끝난다고 버려지는 게 아니다. 그에게는 또 다른 그릇으로, 새로운  임무가 주어진다.

 

 

 

고향집에 개가 있었다.

시골이니까 매어놓고 기르지 않았다. 햇강아지일 때는 밥 짓고 난 따뜻한 부뚜막에서 잤고, 조금 커서는 마당으로 나와 마룻장 밑에서 잤다. 날이 새면 마당을 한 바퀴 돌고, 동네 우물터를 한 바퀴 돌고, 다른 집 개들과 어울려 들판을 뛰어다녔다. 그렇게 실컷 놀다가 해가 깜물 지면 겅정겅정 집으로 돌아왔다.

그야말로 우리 집의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자유로운 영혼도 제일 먼저 가는 곳이 있다. 마당 안에 있는 수돗가다. 거기 제 밥이 있었다. 삼시 세끼 식사가 끝나면 어머니는 먹고 남은 밥을 말아 수돗가 개 밥그릇에 담아 주셨다. 개가 받아먹는 밥그릇이란, 설거지에 서투른 누나가 재깍 깬 이 빠진 밥그릇이다.

 

 

 

누나는 밥그릇을 깨고 어머니 야단에 눈물을 쏟는다. 눈물을 쏟아내게 한 이 빠진 밥그릇은 버려지지 못한다. 기다리고 있는 임무가 그에게 있다. 그 일이 개밥그릇이 되는 일이다. 부엌에서 가까운 수돗가가 개가 밥을 먹는 자리다. 그로 인해 밥그릇은 안방 밥상 위에서 물러나와 수돗가 땅바닥으로 자리를 옮아앉는다.

개는 넓은 세상을 싸질러 다니다가도 때가 되면 겅정겅정 외양간을 돌아 들어와 훌쩍훌쩍훌쩍 말아놓은 밥을 먹었다. 넓고 기다란, 그리고 매우 유연한 붉은 혀로 밥 한 그릇을 다 먹고 나면 입가며 콧등까지 말끔하게 핥는다.

 

 

 

 

이렇게 해서 개밥그릇의 소임은 끝나는가? 아니다. 더 할 일이 남았다. 말끔히 한 끼 밥을 뚝딱 먹고 나면 양이 차든 안 차든 개는 만족이다. 제 밥그릇 앞에 넙죽 엎드려 밥그릇을 가지고 놀 일이 남았다. 앞발로 데굴데굴 굴려도 보고, 뒤집어엎어도 본다. 뒤집어엎은 그릇을 주둥이로 일으켜 세워도 본다.

그뿐인가? 밥그릇에 코를 박아 그릇을 들어올리기도 하고, 휙 날려 흙마당에 툭 떨어지게도 한다. 그럴 때 개의, 밥그릇에 대한 집중력은 가히 뛰어나다. 누가 옆에 다가가도 모를 만큼 그 일에 몰두한다.

연인처럼 두 발로 밥그릇을 끌어당겨 제 가슴에 껴안기도 하고, 목덜미 밑에 떡 베고 누워 허공에 발길질을 하기도 한다. 이 빠진 밥그릇은 마치 입안의 혀처럼 개가 의지하는 대로 몸을 맡긴다. 마치 두 자유로운 영혼처럼 어울려 하나가 되듯 논다.

 

 

 

그렇다고 둘 사이가 매양 행복할 수만은 없다.

개는 어디서 체면을 깎이고 들어오면 물어뜯을 듯이 이빨로 밥그릇을 짓깨물며 분풀이를 한다. 걷어차기도 하고, 밥그릇을 딜딜딜딜 굴려 혼쭐을 빼어놓는다. 그렇게 험하게 굴리다가 아차, 하여 수돗가 시멘트 모서리에 탈싹 부딪히는 날이면 밥그릇은 절명한다.

“이누머 개 좀 보게. 제 밥그릇을 깨어먹었네!”

읍내 장에서 돌아오시다 깨어진 개 밥그릇을 보면 어머니는 화들짝 놀란다. 그러나 누나가 눈물을 폭 쏟던 때와는 달리 한번 그러시고 만다. 사람을 공경하던 밥그릇이 아닌 개의 밥그릇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더는 군말 없이 깨어진 그릇을 주워 집 앞 감나무 그루터기에 쨍강, 던지고 손을 터신다. 이로써 밥그릇은 이제 그릇의 소임을 다 했다. 깨어진 조각들은 거기에서 비에 씻기고, 바람에 닦이고, 백설과 찬 서리에 금이 가면서 사람의 집에 아기가 태어나고, 그 아기가 커서 글을 읽고 쓸 때를 기다린다.

 

 

 

먼 훗날, 그 아기가 마당에 걸어나와 표현하고자 하는 도구를 찾을 때, 그때 그 아기의 눈에 띄는 것이 있다. 그게 바로 감나무 그루터기 밑에 오래도록 버려진, 조각조각 깨어진 개밥그릇의 잔해, 사금파리다.

아기는 사금파리 하나를 주워들고 마당에 글씨를 쓴다.

“바둑아, 나하고 놀자.”

그 옛날의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개는 이미 없고, 사금파리도 자신이 사람을 공경하고, 개의 목숨을 이어주던 밥그릇의 한 조각임을 이미 알 리 없다. 세월이 많이 흘렀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집 바깥으로 나갔던 사금파리는 다시 집 마당으로 들어와 흙 위에 글씨를 쓰는 연필 대용이 된다. 때로 아기의 손에 잡혀 땅따먹기 놀이의 국경선을 긋는 노릇을 하거나, 아기가 커 달음박질을 할 때 그의 손에서 그어지는 출발선이 되기도 한다.

흙으로 빚어진 밥그릇은 고온의 열에서 태어났다. 그 뜨거운 인내 끝에 숭고한 밥그릇이 되었고, 마침내 절명한 연후 다시 한 아이의 글씨를 익히는 사금파리 연필이 되었다가, 몇 백 년을 또는 그 후 몇 천 년을 풍화와 침식 끝에 다시 그 옛날의 흙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다시 그릇으로 태어나길 기다리는 아름답고도 오랜 잠.

 

 

 

제라늄 화분의 물 받침이 된 밥그릇을 바라본다.

그의 일대기가 가히 엄숙하면서도 영원이라는 시간대에 가 닿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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