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집에 전세 들어 살기
권영상
우면산 샘물터 근방엔 참나무들이 많다. 4,50년생은 됨직한 늠름한 나무들이다. 여름엔 초록색 그늘을 드리우고, 늦은 가을엔 굵고 살찐 도토리를 툭툭 떨어뜨린다. 볼수록 풍요하고 기품 있는 나무들이다.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인 건 아닌 모양이다. 우면산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까치들 눈에도 그렇게 보였던가 보다. 늠름한 참나무 우듬지에 보기 좋게 둥지를 틀어 살고 있다. 대궐 같은 집이다. 한두 채가 아니다. 대여섯 채는 된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서서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지어진 까치집을 올려다본다.
“까치집에 전세 들어 한번 살아봐?”
그런 쓸데없는 질문을 불현 해본다.
나는 슬슬 숲으로 들어선다. 이 산을 오르내린지 20년은 넘었다. 산정을 향해 난 길은 물론이요, 이 산에 거주해 사는 나무들과도 안면을 튼 지 오래 됐다. 정말이지 형님 아우 한다면 하고도 남을 사이다. 내 마음이 품고 있는 나의 고민이나 나무들이 안고 있는 나무들의 고민이나 서로 알만큼은 알고 지내왔다.
“그러니 까치집에 세 들어 산대도 심심하진 않겠네.”
나는 그쯤에서 픽, 하고 웃었다.
내가 까치집에 들어가 산다면 당장 뭐가 필요할까, 그 웃기는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을 하며 나는 또 내게 실망했다. 어디든 필요한 걸 챙겨들고 갈 생각부터 한다. 편리함의 추구다. 지독히도 편리주의에 의존하는 습성에 나는 놀란다. 정말 까치집으로 이사를 갈 거라면 필요한 걸 들고 들어갈 게 아니라 가진 것부터 버릴 생각을 해야 한다.
까치집에 가 살자고 아내와 딸아이에게 의향을 물으면 일언지하에 거절당할 건 뻔하다. 당신이나 바람 부는 까치집에 올라가 잘 살아보라고. 아니 며칠 만에 내려오나 보겠다며 코웃음을 칠거다. 그러니 간다면 나 혼자 가야 한다.
정말 까치집으로 이사를 갈 거면 버릴 게 많다. 내가 오랫동안 써온 책상, 그 무거운 건 가져갈 수 없다. 옷장을 열면 입을 것도 없으면서 가득 걸려있는, 아니 서랍장까지 가득 차 있는 내 사시사철 옷도 포기해야 한다. 신발장을 좀 보자. 우리 세 식구 신발이 들어있는 신발장도 신발들로 꽉 찼다. 그 중엔 나의 구두 세 켤레와 운동화, 트레킹 운동화, 등산화, 그리고 여름용 가죽샌달이 있다. 아깝지만 그들을 가져가는 일도 포기해야 한다. 까치집엔 그들을 들여놓을 공간도 없고, 그 무게를 견디지도 못한다.
포기해야할 것들도 많다. 뭐니 뭐니 해도 내 방에 쌓여있는 책들이다. 책을 읽지 않으면 짐승이라도 될까봐 열심히 읽던 책들이다. 두 말없이 포기해야 한다. 단 한권의 시집만이라도 들고 갈까 해보지만 그러다가 한 권이 두 권으로 늘어나는 내 욕심을 이겨내지 못한다. 내 몸무게만도 무려 80킬로그램이다. 이 몸만 가지고 올라가도 까치집은 무너질 것이다. 암만 자연 설계공법으로 탄탄하게 지어진 까치집이어도 내 몸 무게는 위험하다. 그런데 시집 한권이라니!
컴퓨터도 포기하는 것이 좋겠다. 그 대신 스마트폰은 어떨까. 세상과의 소통이 때로 절실하다. 요즘 같은 세상에 바깥과 절연하며 어떻게 살 것인가. 통화는 물론이고 내 감정이 갈 때마다 내 감정을 실어 보내는 문자메시지나 카톡이나 페이스북, 그리고 나의 인맥. 나는 인맥을 잃고 싶지 않다. SNS의 향연을 구가할 길이 없다. 그러나 까치집에 진정 이사를 갈 기백이라면 소란스러운 세상과의 절연쯤은 각오해야 한다.
그렇다면 즐겨 쓰는 연필은 어떨까? 메모가 꼭 필요하다면 나뭇가지를 꺾어 나뭇잎에 표기를 해두면 될 테다. 주소록쯤은 어떨까? 혹시 딸아이가 결혼이라도 한다면 사람들에게 초청장을 보내야 한다. 내가 그동안 부조한 축의금 액수가 그 얼마인가. 그건 마땅히 돌려받아야하지 않을까. 그러다가 나는 고개를 젓는다. 내 머리가 기억하는 주소 속의 분들이면 충분하다. 그외의 분들은 포기해야 한다. 탁상 달력 하나쯤은? 그러나 그것도 무겁다. 이제부턴 달력 대신 날마다 뜨는 해의 각도와 노을의 빛깔을 잘 보며 그날의 일기와 절기를 스스로 터득해 날짜 단위가 아니라 계절단위로 살 일을 꾀해야 한다.
잘 나가는 친구의 그림 한 점쯤 까치집 벽에 걸어놓으면 멋지지 않을까. 날아가는 새들이 보며 야, 멋쟁이 화가의 그림이군! 그럴 때 좀 으쓱해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안 될까. 유치한 과시주의일까.
명함이라면 어떨까. 까치집에 사는 나를 보고 사람들이 빈자, 빈자를 외치며 손가락질 할 때 그때 명함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명함을 뿌리면 다들 나를 빈자라며 멸시하다가도 돌변하여 청빈주의자로 우러러볼 테니까. 그러나 그것도 속물적이다. 속물과 속물에 젖은 것들을 포기할 때 내 육신의 무게가 가벼워진다. 그건 절대적이다.
80킬로그램의 내 몸무게를 간추려야 한다. 내 몸 속엔 속물적 무게가 8할은 넘을 것이다. 남 보기에 그럴 듯한 집에, 그럴듯한 차에, 그럴듯한 의복에, 그럴듯한 자식에, 그럴듯한 골프회원권에, 그럴듯한 백화점 VIP 회원권, 내 몸에 가득한 그런 속물성의 무게부터 버려야 한다, 그게 까치집에서 내가 살 수 있는 길이다.
먹을 만큼의 수입이 있으면서도, 입을 만큼의 옷과 신을 만큼의 신발이 있으면서도 더 가지려는 탐욕도 내 몸무게를 무겁게 한다. 남보다 더 행복하려는 욕심과 이기심과 투쟁 심리도 결국 내 몸을 무겁게 만든다.
이 모든 걸 다 버린다면 나의 몸무게는 얼마나 줄어들까. 하늘을 나는 새들의 무게만큼 가벼워질까. 비 끝의 아름다운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을까. 바람을 타고 빈둥빈둥 놀 수 있을까. 정말 그때가 되면 나는 희망적이다.
평생 집값을 갚아대는 대출금 상환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다. 단 한 벌의 옷으로도, 단 한 켤레의 신발로도, 세상의 시끄러운 뉴스를 모르고도 나는 자유로울 수 있겠다. 많은 인맥에서, 수없이 날아오는 결혼 초대장에서, 세금에서, 카드결제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겠다.
아, 나는 내일쯤 번지가 없는 까치집으로 이사를 가야겠다.
나는 이제부터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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