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햇살 아까운 걸 안다

권영상 2015. 1. 16. 15:46

햇살 아까운 걸 안다

권영상

 

 

 

 

 

11시 20분쯤이면 햇살이 거실바닥에 내려온다. 나는 그때를 맞추어 손을 놓고 내 방에서 나온다. 갓찧은 쌀 한 섬을 부어놓은 듯 햇살이 거실바닥에 수북이 쌓여있다. 보기만 해도 배부르고 반갑다.

예전엔 겨울햇살이 이렇게 반갑지 않았다. 지천이었으니까. 하루 종일 거실이 꽉 차도록 해가 들었으니까. 그때만 해도 흔한 게 햇살이었다. 시들어가는 친구네 화분도 우리 집에 옮겨놓으면 통통하게 살이 올랐다. 그때는 주말농장에서 크던 부추도 흙째 화분에 담아 베란다에 내놓으면 겨울 내내 입술에 초록물이 들도록 먹었다.

 

 

 

그러던 것이 건너편에 25층짜리 아파트가 들어서면서부터 우리는 겨울햇살을 거의 다 잃고 말았다. 햇살이라곤 정오 무렵을 전후해 1시간을 머물다가 훌쩍 사라진다. 그때부터 우리는 햇살 아까운 걸 알아갔다. 가끔 쓰는 앉은뱅이책상이며 노트북을 창가 쪽으로 옮겼다.

 

 

 

거실에 나온 나는 햇살더미에 손을 디밀어 본다. 벌레가 기듯 곰실곰실 손등이 간지럽다. 쿠키가 구워지듯 손이 익는다. 그러다가 얼핏 떠오는 생각이 있다. 다들 일이 있다며 집을 나간 토요일의 빈집. 이때다. 나는 요 햇살자리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작은 밥상을 찾아 밥과 끓인 무국을 놓았다. 냉장고 속에서 꺼낸 볶음 멸치와 순무김치, 그리고 아내가 아침에 해놓은 동그랑땡.

 

 

 

밥상을 들고 가 거실, 소복한 햇살 자리에 놓았다. 나는 밥상 앞에 앉았다. 한 숟갈 밥을 뜬다. 윤기가 난다. 어렸을 적이다. 어머니는 가끔 내가 뜬 밥숟갈 위에 김치 한 쪽이나 생선 한 점을 얹어주시곤 했다. 마치 그 때의 어머니처럼 누가 내 밥숟갈 위에 통통한 햇살을 한 톨씩 얹어준다. 나는 밥만 먹는 게 아니다. 밥을 뜰 때마다, 볶은 멸치를 집을 때마다 한 톨씩 얹어놓아 주는 햇살까지 먹는다. 그 덕에 몸 안이 막 더워지는 것 같다.

 

 

 

햇살점심을 마치고 귤 하나를 먹는다. 먹고 난 노란 껍질은 버릴 수 없다. 가위로 잘게 썰어 거실 햇볕에 말린다. 과일 껍질을 말려온지 오래다. 귤이면 귤, 사과면 사과, 감이면 감. 먹고 난 껍질을 말리는 일은 내가 하는 일이다. 이틀이면 바짝 마른다. 과일 껍질 말리는 동안은 거실 안에 과일향이 풍겨 좋다. 누가 움씰, 하기만 해도 코 안이 향긋하다.

 

 

 

지난해 겨울에도 과일껍질을 말렸는데 무게만도 5킬로그램은 좋이 되었다. 그 많은 양을 버린다면 모두 쓰레기다. 이걸 모두 지난 봄 16포기 토마토 거름으로 썼다. 그때 나는 기분이 좋았다. 과일껍질조차 흙으로 돌려주는 내 착한 행실 때문이었다.

 

 

 

“보기 흉하게 거실에다 그런 걸 말리다니.”

처음 아내는 과일 껍질 말리는 나를 마뜩찮아 했다. 남자가 궁상스럽게 그러느냐고 나를 탓했다. 그런데 이 작은 일이 지구를 살리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먼저 생각한 건 아내였다. 우리들의 과일껍질 말리는 일이 생태적인 삶 중의 하나라면 좀 궁상스럽대도 괜찮다. 지구의 한 모퉁이를 내 손으로 살려낸다고 생각하면 내가 뿌듯하다. 무엇보다 이 착한 일을 내게 가르쳐준 건너편 고층 아파트가 미운 게 아니라 오히려 고마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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