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은사시나무의 외로운 이별

권영상 2015. 1. 6. 20:55

은사시나무의 외로운 이별

권영상

 

 

 

 

추운 아침.

자리에서 일어나니, 목이 아프다.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그냥 잔 탓이다. 아침을 먹고 난 뒤 상비약을 찾아 얼른 입에 털어 넣었다. 여간해 감기에 잘 안 걸리는 편이다. 하지만 한번 걸렸다 하면 한 달을 끙끙대며 앓는다. 지난해에도 그랬고, 지지난 해에도 단 한 번의 감기로 겨울 내내 홍역을 치렀다.

 

 

 

몸에 열 기운이 있었지만 모자를 푹 눌러쓰고 집 앞 우면산으로 갔다. 어차피 찾아오는 감기라면 집에 앉아 맞이하는 것보다 움직일 만큼 움직이다 눕는 게 낫다. 찬바람을 떨치며 산 정상에 올랐다. 그리고 내려올 때는 늘 다니던 길을 바꾸었다. 낮은 산허리 길을 빙 돌아왔다. 예술의 전당 뒤편쯤에서다. 큼직한 은사시나무가 길을 가로막고 쓰러져 있다. 쓰러진지 며칠은 된 듯했다. 나무 잔등에 사람들이 딛고 넘느라 묻혀놓은 흙이 보인다.

 

 

 

이 나무도 여기 오래도록 거처를 하다가 끝내 겨울바람을 못 이기고 쓰러진 모양이다. 맨몸뚱이로 쓰러져 누운 나무를 보려니 안 됐다. 마치 이 도시 근처를 지나가던 외로운 거인이 쓰러진 듯하다. 나는 두 팔을 벌리고 누운 나무를 안았다. 차다. 좋이 한 아름은 되겠다. 이렇게 큰 나무가 왜 쓰러졌을까. 부러진 나무 밑동을 보니 속이 상할 대로 다 상했다. 거죽도 나무빛깔을 잃어 꺼멓다. 그러나 나무 우듬지 쪽 목피는 다르다. 은사시나무 특유의 청회색 빛을 띠고 있다. 속도 단단했다. 말라죽은 삭정이 한 가지를 꺾어봤다. 뜻밖에도 살아있다. 몸은 쓰러져 누웠지만 아직 나뭇가지엔 푸른 기운이 숨어있었다.

 

 

 

나는 서너 걸음 물러나 길게 누운 은사시나무를 바라봤다. 늘 평화로움만 깃들어 있을 듯한 숲에도 생로병사가 있다. 나고 성장하고 병들고 죽는 일이 인간의 세상과 마찬가지로 다반사다. 나무라고 왜 목숨을 지탱하는 일에 고충이 없겠는가. 지금 산비탈 그늘에 서서 추위와 바람을 견디고 있는 숱한 나무들처럼 이 은사시나무도 살아생전 이 냉혹한 산비탈의 겨울을 참아냈을 것이다. 하늘을 물들이는 일몰을 그리며, 한 때 영화로웠던 날들을 떠올리며, 머지않아 다가올 봄을 꿈꾸며 바람과 맞섰을 것이다.

 

 

 

고개를 젖혀 은사시나무 섰던 하늘을 쳐다본다. 그가 누렸던 하늘 한 자리가 둥그렇게 비어있다. 나무 한 그루가 생존하는데 쓰인 하늘이라 해봐야 고작 서너 평 남짓하다.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나무는 자신에게 닥친 생로병사와 싸웠다. 그러나 저 텅 빈 은사시나무의 하늘도 머지않아 성장할 그 어느 나무에 의해 메워질 것을 생각하니 안타깝다.

다행스러운 것은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고 쓰러졌다는 점이다. 나이를 먹으면서 자신이 쓰러져 누울 자리를 늘 눈여겨보았던 모양이다. 해마다 여름 장마가 끝난 뒤면 여기저기 쓰러진 고목들을 본다. 그들 중에는 주변에 선 나무들의 가지를 부러뜨리거나, 한창 크는 나무의 중둥이를 분지르며 쓰러지거나 아니면 이웃 나무의 잔등을 짓누른 채 더는 쓰러지지도 못하고 만 나무들도 있다. 그런데 은사시나무만은 다행이다. 빈자리를 찾아 누웠다.

 

 

 

“다음 세상에는 하늘을 나는 새로 태어나거라. 은사시나무.”

나는 그의 다음 생을 염원하며 돌아섰다.

걸어오면서 생각해 보아도 이상하다. 자주 다니는 길이 아니어도 20여 년이 넘도록 쭉 다녀온 길이 이 길이다. 근데 여기 이 산에 은사시나무가 있었다니! 나는 여태껏 이 숲에 은사시나무가 사는 줄 몰랐다. 그가 이 세상을 뜨고 난 뒤에야 나는 그가 여기 우리와 함께 호흡하며 살던 나무임을 알게 되었다. 어떤 사람의 외로운 이별처럼 이제야 은사시나무의 존재를 알았다는 것이 미안할 뿐이다.

집에 가는 대로 더운 물에 몸을 담그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