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권영상
“아저씨이!”
나는 강 건너 나룻배를 향해 소리칩니다.
사람 없는 빈 나룻배만 묶여 있지만 나룻배는 한 몫의 사람입니다. 나룻배는 물 건너 느릅나무 그루터기에 매여져 혼자 함뿍 볕을 맞고 있습니다.
“배 좀 보내주세요!”
나는 또 그 빈 나룻배를 향해 소리칩니다.
그 때입니다. 옥수수밭 사잇길로 맥고모자를 쓴 아저씨가 나타났습니다. 그분은 대답 대신 이쪽을 향해 한 손을 들어 보입니다.
나는 이 강을 건너기 위해 평창 버스터미널까지 버스를 타고 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1시간 가까이 여름날의 옥고개를 넘어 혼자 걸어왔습니다. 옥고개는 길고도 높은 산언덕 마루입니다. 좀은 힘들어도 옥고개에 올라서면 마음을 활짝 열어주는 풍경이 있습니다. 구불구불 마을을 감싸고 흐르는 반짝이는 강입니다.
이 강이 평창강입니다. 나룻배로 그 강을 건너면 배가 닿는 산마을이 다수리. 산다래 덩굴 우거지고, 다래꽃 하얗게 피는 마을이지요. 모여 앉은 집이라 해 봐야 대여섯, 골짝골짝 한 채씩 떨어져 앉은 집이 또 예닐곱. 다수리 사람들은 칡꽃, 싸리꽃, 다래꽃, 아카시꽃으로 꿀벌을 치거나 메밀꽃을 보며 살거나 옥수수를 키우며 산에 기대어 살지요.
그 다수리에 내가 좋아하는 한 여자가 있습니다.
그녀를 만나러 가려면 이 강을 건너야 합니다. 강물은 깊은 산을 휘돌아 나오는 살물이라 빠르고 힘찹니다. 물 밑은 반은 달걀 모양의 자갈이고, 반은 갯수를 셀 만큼 희고 굵은 모래입니다.
이쪽은 자동차가 다니고, 전기가 들어오고, 청바지를 입은 사내들이 있고, 장발머리가 잡힐까봐 경찰을 피해야 하는 긴장감 도는 곳입니다. 그러나 그쪽은 은둔의 나라입니다. 집집마다 순박한 제비나비나 다람쥐가 내려와 집을 보다가 주인이 오면 슬그머니 자리를 비켜주는 곳입니다. 전기나 자동차 없이도 행복하게 사는 곳이지요.
그때 나는 두 달에 한 번 정도 그녀를 찾아 이 다수리로 왔습니다.
“아, 선생님 만나러 오셨군요.”
강에 가로놓인 줄을 잡아당기며 나룻배가 가까이 다가옵니다. 뱃사공인 아저씨가 나를 알아보십니다.
내가 좋아하는 그녀는 물 건너 마을 다수리분교에 있습니다. 선생님이긴 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강사입니다. 정식 발령이 나기 전에 빈자리를 찾아와 잠시 동안 아이들을 가르치는 임시 선생님이었지요. 그녀가 근무하는 다수리분교엔 선생님이라곤 여 선생님 두 분. 그 중 한 분이 건강이 안 좋아 휴직을 하고 있는 중이어서 그 자리가 비었던 거지요. 그때 내가 좋아하던 그녀의 나이 24살. 산다래꽃이 예쁘지만 그녀만은 못했습니다.
나는 나룻배 아저씨와 함께 줄을 잡아당기며 강을 건넙니다. 그녀를 빨리 보고 싶지만 보조를 맞추어야 합니다. 급할 것이 없는 아저씨와 손을 맞추어 천천히 강을 건넙니다. 그때에 강물 위에 내려앉은 산 그림자를 바라봅니다. 물 밑으론 흐름이 빠를 테지만 물 위의 산 그림자는 조용히 머물기를 다 합니다. 어쩌면 속으론 그녀 때문에 바장대면서 겉으론 태연한 척하는 나를 닮았습니다.
뱃머리가 산 그림자를 흔들며 천천히 강기슭에 닿을 때쯤 그녀는 강기슭 느릅나무 그늘 밑에 와 서 있습니다.
“잘 있었어?”
그녀는 수줍어서 내게 말을 못 건네고, 나 혼자 인사삼아 그 말을 던집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물음에도 대답을 못하고 고개만 끄덕여 줍니다.
그렇게 나는 그녀와 만나지요.
나는 그녀와 옥수수밭 사잇길로 들어섭니다. 그 길이 끝나면 메밀꽃 피는 메밀밭 길이 나오고, 메밀밭 길이 끝나면 그 번창한 산수유 푸른 숲길 끝에 하얀 학교 건물이 드러납니다. 아기 손바닥만 한, 작은 분교입니다. 아이들 흔적 하나 없이 분교는 고요합니다. 버찌가 익는 버찌나무 그늘 밑도 텅 비었고, 그네며 미끄럼틀도 고요하다 못해 한적합니다.
나는 그녀와 함께 교실 앞 꽃밭 금잔화를 보며, 달리아 꽃내를 맡으며, 보석같이 예쁜 채송화 꽃을 세며, 교무실 창 위로 비스듬히 올린 나팔꽃 덩굴을 보며 학교를 한 바퀴 돌지요. 그게 그 마을에서 할 수 있는 그녀와의 데이트였으니까요.
저녁엔 다섯 집, 올챙이만한 동네 아이들을 불러내어 달빛에 축구를 하고, 아내의 기타반주에 맞추어 그 아이들과 노래를 부르고, 그쪽 다수리 밤하늘에 뜬 별자리를 찾고, 그녀가 그녀 반 여자아이들과 함께 삶아낸 옥수수를 먹고, 교실바닥에 누워 아이들과 귀신 이야기를 하다가 잠이 들고…….
글쎄 그랬는데, 그만 나는 그녀의 남편이 되었고, 그녀는 내 아내가 되고 말았습니다.
다수리, 이름이 참 아름답지요? 강을 끼고 있으니 물이 넉넉하다는 마을이름이겠지요. 다수리라는 이름만큼 다수리의 다래꽃도 예쁘고, 메밀밭 너머 산에서 울던 뻐꾸기 소리가 오랜 추억 속에 남아있는 마을입니다.
“잘 가세요!”
강을 건네주던 나룻배 아저씨의 순박한 목소리도 정겹습니다.
강을 건너오면 다수리와는 너무도 다른 이쪽 세상을 만납니다. 그때는 편리한 이쪽 세상이 사람살기 좋은 세상이려니 했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그쪽의 고요하고 순박한 세상이 자꾸 그리워집니다.
이제는 그 분교도 없어지고, 나룻배 대신 시멘트 다리가 놓여있습니다. 다수리 사람들보다 쉼터를 찾는 바깥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내 머릿속 다수리는 사라진 듯합니다. 다수리는 그동안 순수한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를 말할 때마다 떠올리던 곳입니다. 거기에 나의 스물네 살 사랑도 함께 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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