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험난함과 입맞추고 싶다
권영상
아침 신문을 뒤적이던 내 눈에 “강정호의 험난한 도전, 피츠버그의 꽉 찬 내야진” 이라는 기사가 들어왔다. 야구선수 강정호가 미국 메이저리그에 진출한다는 내용이다. 그를 받아들이겠다는 구단은 피츠버그 파이어리츠. 강정호 선수도 그 구단에 호감을 갖는 모양이다. 내야수인 강정호 선수가 가고 싶어 하는 피츠버그 구단은 하필이면 내야수들이 쟁쟁한 곳이다. 유격수 조디 머서와 곧 영입하게 될 션 로드리게스가 있다. 2루수엔 23홈런 76타점의 닐 워커가, 3루엔 13홈런 52타점 18도루를 기록한 조시 해리슨이 지키고 있다고 한다.
근데 강정호 선수가 원하는 포지션은 그 중에서도 3루다. 야구를 잘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그가 3루에서 살아남기란 험난할 듯싶다. 부푼 기대감만큼이나 그 앞에 닥친 치열한 경쟁 또한 만만치 않을 것 같다.
기사를 읽는 내내 그 ‘험난한 도전’이라는, 말이 풍기는 아름다움에 내 마음이 자꾸 뭉클해졌다. 앞날이 험난할 걸 뻔히 알면서도 그 길을 향해 나가는 힘, 그것은 청년들에게만 있는 특유의 권한이다. 청년들에게나 쓰일 법한 말이어서 이제 내게는 아무 감흥도 없는 말로만 여겼다. 그런데 그 말은 ‘청춘’이나 ‘들끓는 피’, ‘희망’, ‘박동치는 심장’, ‘투쟁’, ‘저항’, ‘밀물’ 등의 말처럼 나를 아침 내내 설레게 했다.
7시 40분, 출근을 하듯 아침밥을 먹고 우면산에 올랐다. 눈 내리고 비마저 온 길이라 산은 미끄러웠다. 내가 다니던 코스를 돌고 미끄러운 비탈길을 간신히 내려가고 있을 때였다. 앞쪽에서 자전거를 타고 올라오는 청년이 있었다. 나는 길옆에 멈추어 서서 그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는 돌과 나무뿌리로 얽힌, 얼고 눈 쌓인 비탈길을 기운차게 자전거를 타고 올라오며, “고맙습니다.” 인사를 했다.
“부럽군요.”
나도 얼른 인사를 했다.
“아니 뭐 이런 걸......”
그가 겸연쩍게 내 인사를 받으며 곁을 지나갔다.
가끔 산악자전거를 타고 이 산을 오르는 이들을 봤었다. 바위와 바위를 건너뛰는 테크닉도 텔레비전에서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지금 내게는 이 청년의 실제 상황이 더 부러웠다. 여기가 산 입새니까 이 청년이 올라갈 앞으로의 가파른 산길은 그야말로 험난하다. 근데도 그 길을 기분 좋게, 내게 인사까지 하며 올라갔다.
나는 다시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종종치며 산을 내려왔다.
“아빠!”
어젯밤이다. 밤늦게까지 뮤지컬 무대에 서고 온 딸아이가 내 곁에 와 앉았다.
“대본 쓸 생각 좀 해봤어?”
딸아이가 물었다.
“아빠한테 그런 거 기대하지 마.”
나는 우편물을 뒤적이며 대꾸했다.
언제부턴가 딸아이는 내게 뮤지컬 대본 타령을 한다. 뮤지컬에 대해 나는 별로 아는 게 없다. 우리나라 뮤지컬 현실을 몇 차례 딸아이한테 들은 것과 책 몇 장을 읽은 게 전부다. 또 있긴 하다. 몇 해 전 내 동시 3편이 어린이뮤지컬로 만들어져 이화여대100주년기념관에서 상연된 적은 있다. 뮤지컬은 그때 처음 보았고, 그 이후 몇 편 본 게 전부다. 그런데 가끔 종용 아닌 종용을 한다.
“아빠 나이가 몇인데 이제 그런 일에 손대겠냐!”
나는 더 이상 딴소리 못하게 나이로 입을 막을 셈이었다.
“생소한 장르니까 험난하긴 하지. 하지만 나이나 국적과는 상관없는 게 대본이야. 제작과 유통도 그렇고.”
“십 년만 젊었어도 도전해보겠지만.”
나는 계속 나이를 들먹였다.
“험난한 길 아빠 좋아하잖아. 아빤 아직 충분히 젊었다구.”
내 손을 꾹 잡아주고는 딸아이는 제 방으로 들어갔다.
그 말을 들을 때도 그랬다. 왠지 그 ‘험난하다’는 말이 자꾸 나를 유혹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내 머릿속이 찡하게 울렸다. 내 나이에 맞고 안 맞고가 문제가 아니다. 내 능력이 되고 안 되고도 문제가 아니다. 그 말이 자꾸 나를 설레게 했다.
바람은 언제나 그랬다.
길을 두고 숲으로 왔다.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지고
구덩이를 헛디뎌 절룩이며 왔다.
때로는 찔레 덩굴에 몸을 긁히면서도
바람은 멀쩡한 길을 두고
언제나 험한 숲으로 왔다.
그런데도
바람의 숨결은 늘 새로웠고
달려가는 방향은 늘 분명했다.
바람은 잘 닦인 길을 두고
언제나 거칠고 험한 숲을 택했다.
내 동시 ‘바람은’이다.
나는 여태껏 판판한 길 위로 지나가는 바람을 본 적이 없다. 내 기억에 바람은 길 없는 숲이거나 폭포 내리치는 계곡이거나 요동치는 바다에서만 보았다. 바람은 누군가 만들어놓은 길이 아니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달려가 길을 만들었다.
오늘은 피츠버그 구단의 쟁쟁한 내야수들과 험난한 경쟁을 하게 될 강정호 선수를 자꾸 생각한다. 그리고 산악자전거로 미끄러운 산비탈 길을 오르던 그 이름 모를 청년의 기분 좋은 인사를 떠올린다. 이 나이에도 험난하다는 말곁으로 다가가 그와 입 맞추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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