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더덕 향기

권영상 2014. 12. 12. 11:25

더덕 향기

권영상

 

 

 

 

 

오전 11시. 덕수궁 옆 조그마한 음식점에서 출판사 편집자와 만날 일이 있다. 시집 출판에 관한 일이다. 어느 정도 출판이 진행되고 있지만 얼굴을 맞대고 해야 할 일이 남았다.

바쁘게 출근하던 그 시절에 비하면 11시는 여유 있는 시간이다. 그런데 사람의 일이란 게 꼭 그렇지만은 않다. 11시 약속이라고 2, 30분 전에 미리 나가 음식점 식탁을 마냥 차지하고 있을 수는 없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시간에 맞추느라 쫓기게 된다. 아침 일을 부랴부랴 마치고 집을 나와 대화 방향 3호선 지하전철을 탔다.

 

 

 

전철 안은 출근 시간대와 상관없이 늘 사람들로 가득하다. 간신히 빈 공간을 찾아 몸을 세우고 손잡이를 잡았다. 이것만 해도 다행한 일이다. 가방을 선반에 얹고 선 채로 책을 꺼내 들었다. 요즘 보는 초록문명에 관한 책이다. 미래의 문명은 성장이 아닌 사람을 덜 피로하게 하는 문명이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니까 지금의 문명을 헐어버리는 게 아니라 이것을 바탕으로 하되 구석구석에 초록이 묻어나도록 해야 한다는 것. 

 

 

 

손잡이를 잡고 책을 읽는 건 독서가 잘 돼서만은 아니다. 서 있는 피로를 줄이고, 또 책 읽는 동안은 시간도 금방 지나가기 때문이다. 충무로역이라는 안내 방송에 시계를 봤다, 시간이 빠듯하다. 항상 이렇다. 약속이나 모임이 있을 때마다 시간에 맞추려고 아등바등이다. 전철이 종로3가역에 섰다. 덕수궁으로 가자면 여기서 인천행 1호선으로 갈아타야 한다. 가끔 가보지만 1호선으로 환승하는 통로는 길고 붐빈다.

역시다. 한산할 듯 한 시간대인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많고 이동 속도는 빠르다. 환승시간에 맞추느라 그런지 요리조리 사람들 사이로 비집고 가는 사람들, 또는 옷자락을 펄럭이며 뛰는 사람, 작은 수레나, 자전거를 끌고 가는 사람들까지 번다한 그 때다.

 

 

 

어디선가 은은하게 풍겨오는 향내가 있다. 풋풋한 더덕향이다. 이 번잡한 지하전철 통로를 따라 흙내어린 더덕향이 풍겨온다. 아직 집 바깥 세상에 적응이 덜 된 이 시각 내 몸이 풋풋하게 살아난다. 나도 모르게 자꾸 코를 벌름댄다. 이 도심 안에 먼 강원도나 울릉도의 초록빛 산자락을 옮겨다 놓은 듯 내 몸 가득히 푸른 생기가 차오른다.

내 예측대로 통로가 끝나가는 모퉁이에 할머니 한분이 앉아 계신다. 스무 개쯤 되어 보이는 더덕을 신문 위에 내놓고 껍질을 벗기고 있다. 무심하게 사람들 물결은 그 앞을 지나치고, 할머니도 더덕을 팔러온 사람 같지 않게 고개를 숙인 채 더덕 손질을 하고 있다. 이 번잡하고 답답한 지하 통로는 그러니까 이 할머니의 손끝에서 푸르고 싱그러운 향기로 채워지고 있는 셈이었다.

 

 

 

 

나도 인파에 밀려 그 할머니 앞을 지나쳤다. 더덕향이 내 코에서 사라질 쯤 환승역으로 막 들어서는 1호선 전철에 올랐다. 그리고는 두 정거장을 더 간 뒤 시청역에 내렸다. 시계를 들여다봤다. 딱 11시다. 빠른 걸음으로 출구를 나가 약속한 음식점에 들어섰다. 내가 먼저 왔다. 자리 하나를 잡아 가방을 내려놓고 앉을 때 편집자도 왔다. 일은 간편했다. 내 글에 맞는 일러스트 작가를 누구로 할 것인지 그가 가져온 그림들을 보고 결정하는 일이다. 일을 마치고 점심 식사를 했다.

 

 

 

편집자와 헤어지자, 나는 다른 볼일을 두고 다시 1호선 전철을 탔다. 내일 안성으로 내려갈 준비를 해야 한다. 종로 3가역에서 내렸다. 그때 문득 더덕을 파시던 할머니가 떠올랐다. 인천행 전철을 타러가던 통로로 다시 가 보았다. 혹시 그분이 있으면 더덕 몇 뿌리를 사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 그분은 없었다. 나는 더덕을 놓고 앉아 계시던 그 자리에 서 보았다. 그 어딘가에 남아 있을 듯 한 더덕향이 흘낏 날아올 것 같았다. 그러나 이미 더덕향기는 혼탁한 지하 공기에 밀려 사라지고 말았다. 허전했다. 꼭 사려고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분을 다시 뵙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아니 어쩌면 마음 내키던 더덕 향을 맡지 못하게 된 일 때문에 허전했을지도 모른다.

 

 

 

할머니는 여기 앉아 무얼 하셨던 걸까.

더덕을 팔러 나오셨던 걸까.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그것도 아닌 듯 했다. 스무 뿌리 남짓한 걸 파시려고 이 환승 통로에 앉아 계실 리는 만무했다. 누가 봐도 이 자리는 더덕을 팔고 살 수 있는 목이 아니다. 이런 환승 통로에 더덕이 있을 거라고 예상하는 사람이 대체 몇이나 될까. 그것도 아니라면 바쁘게 이동하는 사람들에게 잠시라도 에코 향기를 안겨주려 오신 분은 아닐까. 내 생각이 거기에 가 미쳤다.

붐비는 환승 통로에서 가끔 더덕 향기에 코를 벌름대던 때가 더러 있었다. 교대역 2호선에서 3호선으로 갈아타는 어느 차가운 돌계단에서, 또는 구름처럼 사람들로 붐비는 대림역 어느 환승 통로에서 느닷없이 풍겨오던 더덕향이 있었다. 그때마다 풋풋한 자연의 냄새에 피로감이 사라지던 걸 나는 몇 번이나 경험했다. 그때에도 더덕을 앞에 놓은 할머니는 그걸 팔겠다는 의지를 보이지 않은 듯 했다.

 

 

 

그렇다면 혹시 자연을 도시에 옮겨 심는 분.

분명 그분은 역원들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 재빨리 물건을 팔고 재빨리 이동하는 다른 상인들의 요란한 상술과는 달랐다. 마치 자연 모습 그대로 침묵하며 앉아있는, 초록 문명을 꿈꾸는 소리 없는 전령사 같았다.

할머니가 앉아계시던 자리에서 발길을 돌려세울 때다. 통로 벽에 걸려있는 사진들이 내 눈에 들어왔다. 지리산이며 설악산 사진이 커다란 액자에 걸려 있다. 할머니는 혹시 저 사진 속 어디에서 더덕을 캐어와 지친 도시민들에게 향기를 날라주고 다시 사진 속으로 들어가신 건 아닐까. 나는 할일 없는 사람처럼 빛바랜 사진 속 어느 계곡을 더듬다가 발걸음을 옮기고 말았다

코끝에 향긋한 에코 향기가 기억처럼 풋풋하게 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