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순무 김치 김장하던 날

권영상 2014. 12. 4. 12:31

순무 김치 김장하던 날

권영상

 

 

 

 

 

토요일, 아내가 내려왔다. 11월이 다 가도록 텃밭에 둔 순무 때문이다. 이때를 위해 지난 목요일 혼자 안성에 내려와 순무를 뽑고 마늘 심을 밭을 만들어 놓았다. 그간 아내나 나나 손이 나지 않았다. 주말마다 여기저기 행사가 많았다.

올해는 배추 심을 자리에 순무 여섯 이랑을 심었다. 지난 해 잘 지어놓은 마흔 포기 배추를 모두 배추벌레에게 바친 것이 후회 되었다. 다시는 배추 심을 생각이 없어 그 자리에 순무를 심었다. 순무를 심게 된 건 정말이지 우연이었다. 밭을 비워둘 수 없어 우연히 종묘상에 들렀다가 발견한 게 순무 씨앗이었다.

 

 

 

별 생각 없이 무씨 파종하듯 심었다. 그런데 대박이었다. 그렇게 잘 커줄 줄은 정말 몰랐다. 잘 크기만 한 게 아니다.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때마다 듣는 찬사도 대박이었다. 순무 맛을 보기도 전에 순무라는 말 한 마디에 반하는 사람들을 보며 이거 잘 심었구나, 했다.

사람들마다 순무에 대한 어떤 그리움이 있는 듯 했다. 순무는 분명 무 이상의 어떤 향수 같은 것을 불러일으키는 모양이었다. 문득 지나가는 사람에게 두어 개 뽑아주어도 그렇고,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한 상자 가득 실어다 주어도 비싼 과일보다 더 반가워했다.

 

 

 

토요일인 오늘을 위해 순무를 뽑아 땅에 묻어두었다. 때도 때인 만큼 그렇다고 마냥 밭에다 둘 수 없어 틈을 내어 아내가 온 거다. 순무김치 김장은 처음이라 살림에 익숙한 조카내외를 불렀다.

그들이 오기 전에 아내와 텃밭에 마늘을 심었다. 이웃사람들 권유로 검정비닐로 멀칭을 했다. 나는 캔을 잘라 구멍을 내고, 아내는 마늘을 심었다. 손에 흙을 안 대겠다던 아내도 보라색 예쁜 씨앗마늘을 보자, 손이 가는 모양이었다. 군말없이 마늘씨 한 접을 다 심었다.

 

 

 

“저랑 같이 심지 않고 왜 혼자 다 심었어요!”

조카 내외가 약속 시간에 맞추어 왔다. 마늘 심는 모습이 부러운지 투덜댔다.

우리는 김장할 일을 분담했다. 남자들은 마당 수돗가에서 순무를 씻고, 마늘을 찧고, 생강을 벗기기로 하고, 안엣사람들은 방에서 순무를 썰고, 버무리고, 담는 일을 하기로 했다.

늘 썰렁하던 거실에 모처럼 보일러 불을 넘치도록 켰다. 그것도 모자라 전열기까지 켰다. 음식을 조리하느라 가스 불까지 켜고 보니 집안이 후끈후끈했다. 혼자 살면 조용한 맛을 누릴 수 있으나 사람 사는 것 같은 활기가 없어 집이 춥고 고적하다. 그러나 네 사람이 모여, 사는 이야기를 하며, 웃으며, 맞장구를 치며 분주하게 움직이고 보니 집에 활기가 부쩍 돈다. 더구나 이웃 농가에 사시는 두 분까지 합세했으니 작은 거실이 발 디딜 틈 없이 북적거렸다.

“이런 맛에 모여서들 김장하는 거지뭐.”

건너편 할머니께서도 작고 큰일에 일일이 관여해 주셨다.

 

 

 

 

드디어 김치 만드는 일이 끝났다. 아내는 충분하게 삶은 보쌈고기를 내놓았다. 우리들은 두레반에 빙 둘러앉아 뒤풀이를 했다. 갓 만든 순무김치와 궁합인 보쌈고기, 그것들과 궁합인 탁주, 그리고 떡국.

그리고 순무김치 맛에 대한 평가.

“생애 처음 느껴보는 맛이에요.”

“처음엔 쏘고, 마지막엔 아릿하고.”

“중독성이 있어요. 손이 자꾸 가요.”

“이름값을 하네요.”

뒤풀이가 끝나고 작지만 한통씩 순무김치를 안고 동네 분들은 가셨다.

 

 

 

다음 날, 늦은 아침을 먹고 음성이 집인 조카 내외도 떠나갔다. 그리고 점심을 먹고 아내도 내일 출근을 위해 서울로 올라갔다.

그 왁자지껄하던 집안의 열기를 두고 떠날 수 없어 나는 또 혼자 남았다. 그들이 남기고 간 말이며 웃음이며 함께 했던 시간들이 아까웠고, 소중했다.

혼자 남아 보니 알겠다. 예전 명절 끝에 혼자 남아 작별의 손을 흔들어주시던 고향 어머니의 심정을. 생각해 보니 떠나간 사람들이 여기 남긴 말 한마디 표정 하나가 다 정겹게 느껴지고 다 오래도록 가슴에 담아두고 싶다.

“가끔 들르겠어요.”

그런 말.

“불 따뜻하게 때고 지내세요.” 그런 말.

“작은아버지, 저 가요.” 그런 말.

“여보, 추운 데 한 이틀 더 있다가 올라와.” 그런 말.

어느 말 하나 금방 잊고 말기엔 너무나 아깝고 소중한 말들이다.

 

 

 

 

나는 옷을 갈아입고, 장갑을 끼고 마당에 나왔다.

뜰 안에 심은 나무들의 볏짚 옷을 입혀주는 일이 남았다. 가까운 곳에 논벌이 있지만 짚을 구하기가 어려워 힘들게 서울에서 구해온 볏짚을 꺼냈다.

산딸나무, 으름덩굴, 배롱나무, 매화나무, 나무수국. 이들은 모두 올봄 양재동꽃시장에서 사다 심은 나무들이다. 그러니 안성의 겨울도 처음 접하는 셈이다. 안성엔 감나무가 살지 못할 만큼 겨울이 춥다. 나는 서울의 가로에서 본대로 나무둥치에 짚싸개 옷을 입혔다.

 

 

 

 

순무를 키워보고, 순무로 김장김치를 만들어본 것도 처음이지만 나무에 옷을 입혀보는 일도 처음이다. 이 나무들이 겨울을 잘 견디면 내년 봄, 힘들게 겨울을 난 새들이 찾아와 쉬어갈 수 있다. 어느 시인의 시처럼 나무는 새들이 편히 앉았다 가는 의자다.

올해도 겪어보았지만 새들이란 보리수 한 알을 따먹거나 해바라기 씨앗 하나 뽑아먹어도 그냥 가는 법이 없다. 의자에 앉았다 간 값을 한다. 조빗조빗조빗, 노래 한 소절을 들려주고 간다.

 

 

 

혼자 사는 사람에게 새 한 마리가 들려주는 노래 소리는 친구로부터 받는 편지 한 통 만큼 반갑다. 혼자 살면서 배운 것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내가 나와 말하는 법이다. 또 하나는, 내가 아닌 풀이며 텃밭에서 크는 감자와 오이와 토마토며 뜰 안의 나무와 새들과 이야기하는 법이다. 그 중에서도 서로 대화가 오고가는 것은 역시 새다.

짚을 아껴가며 나무 옷을 다 입혀주고난 뒤다.

잠깐 방에 들어와 숨을 돌리는데 밖에서 귀에 익은 소리가 들린다.

 

 

 

창문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이 눈이 내린다.

너무도 뜻밖의 손님이다. 반갑다. 악수를 하듯 창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내 손을 척 받아준다.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옛 친구 같다. 첫눈치고 예사롭지 않다. 폭설 수준이다.

나는 얼른 마당으로 나가 마늘밭이며 옷을 입혀놓은 나무들을 둘러보았다. 때를 맞추어주는 시절이 아름답기만 하다. 마늘밭의 마늘이며 옷을 입은 나무들이 이제 눈 속에서 푹 잠들 수 있을 테다. 비록 냉장고 속에 있긴 하지만 순무김치마저 이 겨울 행복하게 맛이 들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