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만 떨어져 있어도 내가 보인다
권영상
이슥한 밤이면 꼭 한번 잠에서 깬다. 아직 낯선데다가 또 혼자몸이라 내 몸이 긴장하는 듯하다. 어제 같이 서울에 있던 내가 여기 내려와 있다는 것, 그러니까 공간 이동 때문에 오는 심리적인 충격이 있는 듯하다. 잠이 안 오고 정신이 또렷해지면 지금 내가 놓여있는 자리와 시간에 대한 의문이 인다. 태어난 고향과 직장에 매여살던 서울이라는 도시와 그리고 비가 내리면 빗소리가 도닥도닥 들리는 여기 안성.
나는 지금 길을 잃고 여기에 와 있는 건지, 제대로 된 길 위에 서 있는 건지, 그런 내가 놓인 자리에 대한 궁금증이 인다.
오늘도 이슥한 새벽 2시 무렵 잠에서 깼다.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아 창밖을 보려고 창문 커튼을 밀어 올렸다. 두꺼운 커튼 뒤에 뜻밖에도 달이 떠올라 있었다. 집이 남동향이다 보니 정면으로 달을 만난다. 보름달이다. 세상 모두 잠든 밤에도 나를 맞아주는 달이 있다는 게 좋다.
달은 산언덕 참나무 숲을 막 벗어나와 있었다. 혈색이 좋은 사내처럼 얼굴이 붉다. 내게로 껄껄껄 웃으며 다가와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할 것 같다. 마음씨 좋은 분의 얼굴이 이렇다. 남해안의 동박꽃 피는 길을 걷다오거나 아니면 먼 아메리카의 산록을 다녀온 여행자처럼 뭔가 내게 할 이야기가 많은 다정한 얼굴이다.
마을의 밤은 잠이 많다. 산모퉁이 너머에서 가끔 울던 개 짖는 소리도 없다. 늦은 밤 군불을 피우느라 나무 연기를 내던 최 씨 아저씨네 굴뚝도 기척이 없는 밤이다. 이 시간에 있는 거라면 이제 막 달빛에 젖어드는 조용한 마을 풍경뿐이다.
커튼을 끌어내리고 전등을 켰다. 내 방에도 숨겨놓은 불 하나가 있다. 오래된 불이다. 서가에 올려둔 등잔. 등잔을 꺼내어 책상 위에 놓았다. 기억도 잘 나지 않을 만큼 오래된, 인사동 어느 가게에서 데려온 불이다. 국화꽃 무늬가 있고, 유약을 바른 동그란 옹기 등잔이다. 그때는 무슨 마음으로 샀는지는 모르나 한두 번을 켜본 기억이 있다. 그 후로는 기억에서 벗어난 낡은 장식품처럼 거기 있었다.
알코올을 붓고, 그을린 흔적이 있는 심지에 불을 붙였다.
“오, 세상에!”
등잔불이 켜졌다. 꽃잎만하다. 얼마나 오랜만에 보는 등잔불인가. 불은 이 심지 속 어느 퇴적의 시간에 잠들어 있다가 살아났다. 나는 등잔불빛을 방해하는 전등불을 껐다. 흐릿하던 등잔불이 점점 밝아지며 방안이 천천히 환해진다.
이 밤, 이 조고만한 등잔불과 정면으로 마주 앉는다. 내가 반가운지 등잔불이 까불댄다. 까불까불 까불대던 불이 다시 참해진다. 애기 손가락 길이만 하다. 반가운 건 등잔불만이 아니다. 50여 년 전의 옛 동무를 만난 듯 나도 반갑다. 내가 당겨 앉으려고 의자를 당기는 통에 등잔불이 흔들린다. 가까이 다가가는 내 숨결에도 흔들린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등잔불과 나 사이가 흔들리듯 불이 흔들린다. 보름달은 너무 멀어 서로의 움직임에 반향이 없지만 등잔불을 예민하다.
나는 조금 물러나 숨을 고른 뒤에야 불을 바라보았다. 내가 고요해지자, 등잔불도 고요해진다. 우리는 고만한 거리를 두고 앉아 서로를 바라본다. 등잔불은 내 눈이라는 창을 통해 이미 내 안에 도달해 있는 게 분명하다. 내 마음 안이 환해짐을 느낀다. 나를 따라다니던 마음의 흠결도 사라지고, 죄악이 말끔하게 씻겨나는 기분이다. 누굴 미워하던 마음이, 자꾸 게을러지던 마음이 사라지고, 내 유년의 순결 같은 것을 되돌려 받는 듯 내가 정결해진다.
보름달이 캄캄한 지상의 문을 열어준다면 등잔불은 캄캄한 내 마음의 문을 연다. 보름달이 표면의 세계를 보여준다면 등잔불은 내 안을 들여다보게 해준다. 그것은 등잔불이 달빛과 달리 살아 움직이기 때문이다. 등잔불은 심지를 태우며 쉬임없이 빛을 살려 올린다. 살아있는 불앞에서 나도 모를 두려움을 느낄 때 나도 모르게 내 영혼이 정화되어감을 본다.
등잔불 앞에서 정결하기를 바라던 예전의 어머니가 떠오르고, 인생을 죄 없이 사셨던 아버지가 떠오른다. 서울서 마침맞은 이쯤의 거리를 이동해 와서야 나는 나를 들여다 보게 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란 어찌보면 위태롭다. 마음을 잃어버리고 살기 쉬운 세상이다. 진실이 아닌 것에 휘둘리며 살기 쉬운 세상이다. 돈이 전부가 아니라 하면서, 내가 입은 옷이, 내가 사는 집이, 나의 사회적 지위가 그게 뭐 그리 중요하냐면서도 그쪽으로 기울어지는 나를 보며, 우리 사는 세상이 얼마나 마음을 잃어버리기 쉬운 세상인가를 실감한다.
이 꽃잎만한 등잔불을 통해 그런 세상을 살고 있는 나를 본다.
사람이 사는 이 세상엔 ‘거리’가 필요하다.
등잔불을 편안히 바라보려면 등잔불과 나 사이의 거리가 필요하듯 거리를 두고 물러나 보면 세상도 보이고 나도 보인다. 내가 살아온 삶이 솔직하게 보인다. 낯선 시간으로의 이동도 필요하다. 한낮으로부터 한참 떨어진 이 새벽 시간. 그 시간의 거리만으로도 내가 살아온 뒷모습이 보인다.
그 배경에 오랫동안 끄고 살았던 등잔불이 있다. 생각없이 살게 하는 바보 형광불에서 잠시라도 벗어나 보고 싶다. 바람에 흔들리는 등잔불을 두 손으로 가려 살려내듯 세상의 입김에 흔들리는 나를 살려내려면 형광불에서 비켜서야 한다.
두 벌 잠을 위해 등잔불을 끄고 잠자리에 눕는다.
꺼져버린 등잔불이 다시 내 안에서 환히 켜지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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