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불러주는 노래
권영상
대관령을 넘어서자, 바다가 저 멀리 보였다. 고향 강릉이다. 벌써부터 마음이 설렌다. 추석을 쇠러 가는 길이니까 당연히 강릉 방향으로 달려야 한다. 그런데 다른 바다가 내 핸들을 왼쪽으로 돌렸다. 양양 속초로 방향으로 돌아선 우리는 북강릉에서 나와 5분 거리의 조그마한 포구 사천에 닿았다.
고향집에서 큰조카가 어디쯤 왔느냐고 전화를 해오면 ‘다 왔다’고 둘러대고는 금방 갈 수 있는 거리가 사천이다.
명절이라 한번 집에 들어가면 바다를 보겠다고 다시 나오기는 어렵다. 남들은 송편을 빚네, 지짐이를 부치네, 바쁜데 거기서 빠져나오는 일은 얌체짓이다. 그렇게 바쁜 걸 빤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 몰래 사천으로 숨어드는 건 악행이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악행을 저지르지 않으면 바다를 곁에 두고도 바닷물 한번 만져보지 못한 채 그냥 부랴부랴 고향을 떠나고 만다. 그게 무려 지나간 수십 년이다.
우리의 죄만이 아니다. 우리를 은밀히 불러들인 바다의 죄도 있다.
차에서 내린 아내와 딸아이와 나는 무슨 굉장한 사건의 공범들처럼 바다를 향해 걸어나갔다. 푸른 해송 숲에 숨어들듯 몸을 감추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게 도리가 아닌데, 아닌데 하면서 걸었다. 우리는 멀쩡한 정신이 아니었다. 시를 읽어주는 감미로운 목소리에 이끌려가듯, 밀감 향기에 이끌려 밀감밭으로 발걸음을 옮기듯 바다가 우리를 이끌어 당겼다. 그 모든 죄는 바다가 짊어져야 했다.
솔숲 끝에 파아란 바다가 파노라마 화면처럼 쫙 나타났다.
“아빠, 바다!”
딸아이가 제일 먼저 바다를 향해 뛰었다.
나와 아내도 푹푹 발목이 빠지는 모랫벌을 걸어내려가 바다와 딱 마주 섰다. 얼마나 오랫만에 마주 서 보는 바다인가. 바다가 막힌 내 가슴을 열고 밀려들었다. 내 몸이 파랗게 물들어갔다. 9월의 바다는 고난을 겪고난 쉰 중반의 사내를 닮았다. 폭염에 시달리고 오랜 장마비에 시달려본 얼굴빛이다. 노도하던 폭풍의 몸부림을 가라앉히고, 검은 먹장구름을 벗어버리고, 바다는 이제 한숨 돌린 잔잔한 모습으로 누워있다.
"아, 좋다!"
우리 입에서 한숨과 함께 그 말이 튀어나왔다. 악행으로 숨막혀 있던 목구멍이 탁 열리는 그 소리는 비명에 가까웠다. 사느라 여기저기 맺혔던 응어리가 그 비명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나는 다시 태어나는 기분이었다.
나는 양말을 벗고 바다에 들어섰다. 모래톱을 찰싹대던 파도가 내 두 발을 기꺼이 받아준다. 나는 나이를 다 잊은 어린 짐승처럼 파도를 따라 모래톱을 걸어본다. 맑고 투명한 9월의 파도는 내 발을 파랗게 씻으며 간지르며 흠뻑흠뻑 적신다.
모래톱 끝에 거석 같은 바위 넷.
바다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들어가다가 우뚝 멈추어선 거인들 같다. 옛날에 바위 밑에 엎드려 있던 늙은 용이 연산군 7년 가을, 바위를 깨뜨리고 떠나가는 바람에 두 동강이 났다는 교문암, 교산 허균바위다. 세상을 뒤집어 엎으려던 풍운아 허균이 살던 곳이 이곳 사천이다. 작고 한적한 이 바닷가 마을에도 허균의 실패한 혁명이 애잔하게 남아있다. 상처받은 한 사내의 비운을 바다는 이런 전설로 쓰다듬고 쓰다듬고 한다.
모랫벌에 누워 허균바위 너머의 수평선을 본다. 구름 한점 없다. 하늘은 어쩌면 이렇토록 파랗는지. 너무 패래 눈을 감는다. 딸아이도 내 곁에 와 눕고 아내도 눕는다. 정신줄을 놓는다면 소르르 바닷잠에 빠질 것 같이 위험한 시간이다.
아까까지도 못 듣던 노래소리가 들린다. 바다가 들려주는 노래다. 파도랄 것도 아닌 잔 물결이 찰싹찰싹 모랫벌을 울리는 노래다. 그 곰살맞고 살가운 노래가 굳은살 박인 내 몸을 흔든다. 불면에 시달리는 나의 영혼을 대양은 이토록 작은 노래로 달래줄 줄 안다.
막 한숨 잤으면 좋겠다 싶은 그때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아니나 다를까 큰조카다. 어디쯤 왔느냐고 물었다. 오면 송편 빚는 재미를 느껴보라고 안 빚고 기다리고 있단다. 그 말을 들으니 미안하기 짝이 없다.
우리는 등 뒤에 바다를 그대로 두고 다시 차에 올랐다. 노란 가을 볕과 옥색으로 빛나는 바다, 그리고 철지난 바다의 여유로움과 한가함, 그것이 들려주는 노래를 들으며 액셀러레이터를 밟는다.
"이만만해도 살 것 같애."
아내 목소리가 밝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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