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형
권영상
새로이 산 손수건은
곱고 깔끔하긴 하지만
눈물은
받아들이지 못하지요 적어도
손수건이 손수건이려면
깔깔한 성질은 마땅히 버려야지요
주머니에 손을 넣었을 때
손 안에 포근히 잡히는
엄마의 낡은 치맛자락 같은 부드러움
손수건이 손수건일 테면
그래야겠지요
알맞게 낡은 뒤에야 한 방울 눈물까지도
따듯이 받아줄 테니까요
졸시 <손수건>
“또 그 옷?”
내가 갈아입고 나온 오랜지색 티셔츠를 보고 아내가 또 성화다. 오늘은 아주 내가 입은 티셔츠를 벗겨낼 태세다.
“아니, 옷이 없어? 그 많은 티셔츠 두고 하필 이 낡은 옷이야!”
이런 말 들은 것만도 수십 번이다. 그런데도 나는 아내가 깊숙이 찔러둔 티셔츠를 찾아내어 입고 나왔다.
“편해. 세상에 이것만큼 편한 옷 없다구!”
나는 또 그 대답이다. 그것외에 다른 대답이 있을 수 없다. 내가 생각해도 내 고집이 쇠고집이다. 맨날 똑 같은 옷 입는 거 보는 사람도 힘들다는데 내가 좋다는 이유로 맨날 오렌지색 티셔츠다. 얼마나 오래 입었는지 오렌지색이 연한 갈색으로 바랬다. 빛에 비추면 건너편 빛이 훤히 들어온다. 2,3년은 입은 것 같다. 겨울에도 런닝셔츠 대신 티셔츠를 입으니까 사계절을 입어왔다. 다른 옷들, 그러니까 산 지 얼마 안 된 옷들은 왠지 편하지 않다. 옷의 스타일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탓에 내 몸이 옷에 구속되는 느낌이다. 실제로 새 옷의 깔깔함이나 옷의 부위부위를 살리려고 일으켜 세워놓은 부분들은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
그런데 낡은 오렌지색 티셔츠는 다르다. 새 옷이 가지고 있는 깔깔한 성질을 모두 버렸다. 비록 헐렁해 보이지만 부드럽다. 입었는데도 입었는지 모를 만큼 살갗과의 마찰이 없다. 옷이 내 몸을 간섭을 하지 않는다. 입었으나 입지 않은 듯한 몸의 자유로움을 배려한다.
그뿐인가? 아니다. 어쩌다 국물을 뜨다 흘리기라도 할 때에 보면 안다. 빳빳한 성질을 가진 티셔츠라면 가슴위에 떨어진 국물을 데구르르 굴려 바지 지퍼 위에 털썩 떨어지게 한다. 그러나 오렌지색 티셔츠는 배척하지 않는다. 제 몸으로 다 흡수해 버린다. 흐르는 땀도 팔을 올려 쓱 훔치면 싫다않고 받아들인다.
누워도 편하고, 뒹굴뒹굴 뒹굴어도 편하다. 험한 일을 해도 좋다. 쉬이 벗어던질 수 있으니까 좋다. 아내가 ‘그 옷?’이라고 얕보는 오렌지색 티셔츠는 그런 이유로 내 곁에 오래 남아 있다.
사람 중에 그런 사람이 있다.
무슨 투정을 하면 제 몸에 국물을 흡수하듯 남의 말에 귀기울이는 사람이 있다. 작은형이다. 때로 사는 일이 힘겨워 형님! 하고 찾아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 그렇지, 고되지, 암, 그렇구말구, 잘 했다, 그러며 말대답을 해준다. 그렇고 그런 뻔한 이야기지만 처음 듣는 것처럼 귀기울인다. 어떤 국물을 떨어뜨려도 형님은 성질을 내지 않고 다 받아준다. 어깨에 힘을 주지 않는다. 내 생각에는, 하고 어쭙잖은 해결책을 내놓지 않는다. 그저 후련하게 들어준다. 떨어지는 국물을 흡수하듯이.
어렸을 적, 아버지에게 야단을 맞으면 어머니 뒤로 돌아가 치마폭에 숨어 울었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막아주기 때문에 어머니 뒤에 숨어 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즈음에 와 생각해 보면 아니다. 어머니의 오래 입으신 낡은 치맛자락이 내 눈물을 마다않고 받아주었기 때문인듯 하다.
나는 오래된 내 오렌지색 티셔츠가 좋다. 오렌지색 티셔츠 같은 식구가 되고 싶다. 젊었을 때는 존재감을 위해 목소리를 냈지만 이쯤 살아보니 아니다. 입었으면서도 입지 않은 듯한 오래된 티셔츠처럼 있으면서도 없는 듯한 편안한 아버지지가 되거나 남편이 되거나 그러고 싶다.
형제들 중에서도 우리는 모두 작은형을 좋아했다. 마치 나의 오렌지색 티셔츠처럼 무슨 일이 생기면 먼저 작은형하고 이야기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작은형의 마음은 형제들의 목소리로 얼룩져있다. 오렌지색 티셔츠를 보면 작은형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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