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배경이 있는 사진

권영상 2014. 9. 22. 12:30

배경이 있는 사진

권영상

 

 

 

 

 

지난여름, 고향에 내려가 하루를 머무는 사이 휴대폰 카메라로 사진 몇 장을 찍어왔다.

그때는 몰랐는데 컴퓨터에 올려놓고 보니 달리아꽃 사진이 자꾸 내 눈길을 끌었다. 달리아꽃이 풍기는 서정성 때문도 있겠지만 그 탐스런 꽃의 배경 때문이었다.

달리아꽃 뒤편엔 장독대가 있다. 뒤집어져 있거나 바로 놓여있거나, 장독뚜껑으로 덮혀있거나 한 장독들. 장독대 둘레엔 아직도 꽃이 피어있는 원추리가 있고, 그 원추리들 사이엔 자두나무인가 하는 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그리고는 빙 둘러가며 붉은 흙담이다. 고향 이웃집 뒤란에서 찍어온 사진이다.

 

 

 

가을 탓인지 뒤란이 아늑하고 정결하다. 그 집 연로하신 어머니의 손길이 고요히 보인다. 붉게 핀 달리아꽃이 내 눈을 끈 건 바로 이런 배경 때문인 듯하다. 한 포기의 달리아가 피는 데엔 원추리고 있고, 여름이면 장맛비에 툭툭 떨어지는 자두 소리가 있고, 고추장을 뜨러 가시는 어머니의 장독뚜껑 여닫는 소리가 필요하다. 그리고 아침마다 뒤란을 쓸어주는 싸리비질소리.

지금 이 한 장의 사진 속엔 없지만 나는 달리아 사진 속에 담긴 풍경뿐 아니라 소리까지 꺼내어 듣고 있다. 이른 저녁 뒤란 뜨락에 앉아 봉숭아꽃을 찧어 내 손톱에 감싸주시던 누님들이며 뒤란 눈을 쓸던 과거의 어느 한 장면까지 떠올려낸다.

 

 

 

한 때 꽃이나 안경, 컵 같은 소품을 찍을 때면 주로 아웃 포커스를 썼다. 아웃 포커스란 배경을 흐릿하게 하고 주제를 선명히 하는 기법이다. 이 기법을 쓰면 배경이 사라지고 피사체가 효과적으로 살아난다.

그런데 요즘은 아웃 포커스보다 충분히 배경을 가지고 있는 사진이 좋다. 나의 사물에 대한 독해력이 떨어진 것도 이유라면 이유겠지만 주변 배경을 통해 사물을 이해하려는 사물 이해 방식이 바뀐 때문도 있겠다.

 

 

 

얼마 전이다.

딸아이가, 사귀는 남자가 있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 나는 괜히 딸아이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어디에 산대? 아버지는 뭐하시고? 엄마는? 연세는 어떻게 되신대? 고향은 어디고? 나는 관심을 갖는답시고 일일이 물었다.

내 말에 꼬박꼬박 대답을 하던 딸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빠, 그 남자애는 궁금하지 않어?”

 

 

 

 

러고 보니 나는 중심인물인 ‘그 남자애’보다는 주변 배경에 대한 것만 물었다. 근데 아주 재미난 건 내 질문에 대한 딸아이의 대답만으로도 나는 벌써 ‘그 남자애’를 어느 정도 이해했다는 것이다. 그런 일을 하시는 그 정도 연세의 부모님이라면 어떤 아들을 키워냈을 지가 딱 떠올랐다.

딸아이가 이야기 끝에 사진과 함께 '그 남자애'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내가 떠올린 남자애와 크게 다른 모습이 아니었다.

 

 

 

내게는 안성에 내려가 가꾸는 텃밭이 있다. 나는 그 텃밭에다 봄부터 감자를 심었다. 그 곁엔 고추 두 이랑을 심었고, 고추 이랑 곁엔 홍당무 한 이랑과 생강을 심고, 강낭콩과 완두콩을 심었다. 완두콩 곁엔 고구마를 심었다.창밖엔 맨드라미와 채송화, 봉숭아와 분꽃을 심었다. 또 다른 창밖엔 도라지꽃을 보겠다며 도라지를 가득 심었다. 그리고 울타리를 따라선 해바라기와 돼지감자를 심었다.

내가 이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했다.

“자네가 어떤 식으로 살고 있는지 안 봐도 비디오다.”

친구들이 놀리듯이 웃었다.

 

 

 

농사꾼인 아버지 곁에서 그 아버지를 보며 젊은 시절을 살았다. 블루베리를 심고, 창밖에 장미를 심으라 하지만 내 성미에는 그게 맞지 않다. 내게는 배우지 못한 무지렁이 아버지가 계시고, 사래가 긴 보리밭이 있고, 집을 빙 둘러가며 흙담장이 있는 그런 배경이 어울린다. 가을볕이 아까워 아침상을 물리시면 지붕에 사다리를 걸쳐놓고 올라가 고추를 널어 말리시는 아버지가 어울린다.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면 나를 전혀 모르는 사람도 비로소 ‘아, 권영상! 이제 알겠다. 그 사람 어떤 사람인지.’ 그러며 나를 더 잘 독해한다.

 

 

 

나는 요즘 언행이나 사건 하나만으로 그 사람을 평가하는 걸 삼간다. 그보다는 언행이나 사건을 둘러싼 삶의 배경을 통해 그 인물과 사건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느닷없이 하늘에서 떨어진 존재는 없다. 모든 존재는 배경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런 점에서 배경 없는 달리아보다 배경 있는 달리아 사진이 좋다. 배경 없는 아웃 포커스 사진보다 수십 명의 가족을 배경으로 하는 시골할아버지의 회갑 사진이 할아버지를 이해하는데 더 효과적이다. 좀 모자라는 건 좀 더 나은 것으로 덮어주면서 할아버지의 참모습을 발견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의 담임선생님, 장영실  (0) 2014.09.27
단풍나무 그늘에서 우체통을 만들다   (0) 2014.09.26
바다가 불러주는 노래  (0) 2014.09.14
작은형  (0) 2014.09.14
펜실베니아의 익어가는 가을  (0) 2014.0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