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나의 담임선생님, 장영실

권영상 2014. 9. 27. 22:13

나의 담임선생님, 장영실

권영상

 

 

 

 

 

그때가 언제이던가. 생각할수록 너무도 오래된 과거의 일입니다. 그러나 또한 너무도 또렷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때가 중학교 3학년, 새 학기가 시작되는 첫날이었습니다. 3학년이 되었다는 긴장감이 나를 휩싸고 있었습니다. 3학년인 우리들은 새 교실을 찾아갈 때 담임선생님이 국어나 수학, 아니면 영어 선생님이길 바랐습니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그때만 해도 담임선생님이 어떤 과목을 가르치는 분이냐가 매우 중요했습니다. 따로 배울 학원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가정교사에게 배울 집안 형편도 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담임선생님에 대한 기대가 컸습니다.

 

 

 

담임이 영어 선생님이면 담임 보기 미안해서라도 영어 공부를 더 하게 되는 거지요. 그때만 해도 어떤 선생님은 종례시간에 수업을 좀 더 해주시기도 하고, 때로는 일요일에 학교에 나와 한 시간짜리 문제풀이를 더 가르쳐 주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어머니들도 그렇고 학생인 우리들도 은근히 중요과목 담임선생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랐지요.

 

 

그런데 새 교실에 들어선 우리들은 모두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교실에 와 계신 선생님이 '미술'이었습니다.

“이제부터 공부 안 해 좋겠다!”

누군가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농구를 다시 시작해야지.”

그런 말도 나왔습니다.

아이들은 모두 그 말에 맞장구를 치며 즐거워했습니다. 그러나 정작은 그게 아닙니다. 그 반대였습니다. 아이들 입에서 나온 건 더 이상 기대할 것 없다는 한숨이었고, 낙담이었습니다. 물론 그 소리는 작은 소리여서 앞에 계신 미술 선생님 귀에까지는 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새 학기 첫날은 그렇게 지나갔습니다. 수업은 없었습니다. 내일 일정을 위한 청소가 전부였습니다. 이제서야 담임선생님 이름을 밝히게 되는군요. 장영실. 선생님은 백묵으로 칠판에 반듯하게 이름을 쓰셨지요. 눈썹이 유난히 검었습니다. 골덴 작업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암만 예전이라 해도 새 학기가 시작되는 날은 모두 양복을 입으셨는데 선생님은 작업복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미술실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막 나오신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다른 아이들도 그랬지만 나도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담임이라면 단정한 머리에, 수염을 깎은 깔끔한 얼굴에, 깔끔한 양복 차림이기를 바랐던 거지요.

 

 

 

학교를 파하고, 집에 돌아와 나를 돌봐주는 둘째누나에게 그 말을 했습니다.

“듣고 보니 좋은 분이시구나. 소탈하신.”

병원에 입원해 계신 어머니 병 수발들랴, 아버지 농사일 거들랴 바쁘기 만한 누나에게 담임선생님은 별 관심거리가 못 되었습니다. 오히려 미술선생님이란 사실이 흥미로울 뿐이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부지런히 학교에 갔습니다. 며칠이나 갈 지 모르겠지만 3학년이 되어 새로운 각오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부지런을 떨었습니다.

교실에 들어서자, 2학년 때와 달리 담임선생님이 벌써 와 계셨습니다.

아이들이 모두 제 자리에 앉자,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첫 선물이라며 스프링 달린 작은 수첩을 돌리셨습니다. 표지에 ‘꿈’이라는 글자가 적혀있는 수첩이었습니다. 수첩을 하나씩 다 받아들자, 선생님이 교단 위에 올라 서셨습니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3학년이라면 누구나 담임이 영어나 수학, 국어 선생님이길 바랐을 거다. 그가 나라고 해도. 그런데 내가 미술이라 매우 실망했을 줄 안다.”

선생님 얼굴은 긴장 되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아침마다 칠판에 훌륭한 명언을 써 주겠다. 이 수첩에 그 명언을 적어 여러분이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지를 고민하길 바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대강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돌아서서 그 날치 명언을 칠판에 외어 적으셨습니다.

 

 

4301년 3월 2일

남에게 의지하면 실망하는 수가 많다.

새는 자신의 날개로 난다.

-르낭

 

나는 칠판에 써놓은 그 명언이라는 것을 멋쩍게 수첩에 적었습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이 명언이 우리에게 당장 급한 고입 성적과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요. 70점인 수학 성적이, 아니 영어 성적이 80점으로 올라가는 데 무슨 기여를 한다는 건가요. 나는 수첩의 첫 장에 아무렇게나 명언을 적고는 탁, 덮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학급 업무를 마친 담임선생님이 교실을 나갔습니다.

“명언 썼다!”

누군가 소리쳤습니다.

기껏 명언이냐는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였습니다.

 

 

 

그 다음 날 아침입니다.

교실에 들어서자, 선생님은 안 계시고 칠판에 명언만 적혀있었습니다.

네 인생을 사랑한다면 네 시간을 사랑하라.

인생은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벤자민 플랭크린.

그 다음 날도 담임선생님은 안 보였습니다. 그리고 칠판엔 선생님 특유의 단정한 백묵 글씨로 쓰여진 명언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말할까, 고민이 되거든 진실을 말하라.

-마크 트웨인

 

 

 

나는 자리에 앉아 세 번째 장에다 그 명언을 적었습니다. 그날도 선생님은 아침 시간 내내 안 보였습니다.

이웃 반에선 누군가 매 맞는 소리가 펑펑 들려왔습니다. 아마 지각을 했거나, 숙제를 안 했거나, 성적이 나빠 맞는 매인 듯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반은 버려진 반처럼 담임 없이 아침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나는 우두커니 명언 수첩을 들여다봤습니다. 첫 장에 쓰여진 명언을 보고, 또 둘째 장에 쓰여진 명언을 보았습니다. 나는 일없이 그 명언을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 아침 시간뿐 아니라 쉬는 시간에도 마치 수학문제의 공식을 외듯 외웠습니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명언은 쓰여져 있었고, 나는 명언을 외었습니다.

 

 

그대여, 힘이 드는가? 하지만 오늘 걷지 않으면 내일은 뛰어야 하네.

-카를레스 푸욜

오늘 일은 내일로 미루지 말라.

-체스터필드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그 꿈을 닮아간다.

-앙드레 말로

 

 

선생님은 여름 방학식이 있는 날도 명언을 쓰셨습니다. 그리고 그 날도 교실을 나가셨습니다. 왜 나가시느냐고 여쭈어 보지만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명언에 관한 일은 무려 2학기가 다 지나갈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그 동안 나는 칼 힐티, 세네카, 카프카, 아우구스투스, 채근담, 칼릴 지브란, 헤세, 파스칼 등의 이름을 알아갔습니다. 명언들은 대체로 그분들의 인생에 대한, 사랑에 대한, 진실에 대한, 실수와 좌절과 희망에 대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지난 1년 동안, 편린 같은 명언을 통해 인생을 공부한 셈입니다. 거기엔 15살 시골 아이가 이해하기 어려운 말도 있었지만 우리는 분명 철학자처럼 인생을 고민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점점 담임선생님의 검정 눈썹과 큰 눈이 좋아졌고, 골덴 작업복이 말쑥한 양복보다 더 멋있고 숭고하다는 것도 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선생님의 그 단정한 백묵 글씨를 사랑했습니다. 그것은 수학 선생님 반 친구가 70점의 수학 점수를 80점으로 끌어올린 것과는 분명히 다른 차원의 변화였습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선생님이 안 계신 아침 시간을 우리들 스스로 조용히 이끌어 갔다는 점입니다. 타인의 힘에 의해 공부를 해 가던 그 때에 우리가 이루어낸 그 일은 너무도 기적 같았습니다. 우리는 그때, 모두 나이어린 철학자가 되어 있었으니까요.

 

 

 

그로부터 50여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며칠 전부터 모 그룹 재단에서 부탁받은 중고등학생들과 대학생들의 수기를 읽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가정적으로 힘든 환경 속에 놓여있습니다. 그런 그들의 수기를 읽으며 묘한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명언입니다. 명언은 어른이 안 계신 가정의 학생들에겐 너무나 소중한 어른의 말씀이었고 길잡이였습니다. 그들은, 깨어진 가정 때문에 방황하고 괴로워할 때 문득 명언에서 깨닫음을 얻는다는 걸 알고 놀랐습니다.

 

인생에는 열 번의 성공의 기회와

열 번의 실패가 찾아온다.

-외상 스트레스 증후군으로 치료를 받던 병원 의사가 들려준 명언

 

 

오늘 누군가가 그늘에 앉아 쉴 수 있는 것은

오래 전에 누군가가 여기에 나무를 심었기 때문이다.

-워런 버핏

 

그들은 이런 명언에 힘입어 수렁을 헤쳐 나오거나 희망을 끝까지 움켜쥐거나 지금의 힘든 환경조차 사랑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지금도 가끔 50여 년 전의 장영실 선생님을 생각합니다.

그분은 우리가 졸업하는 날 아침에도 칠판에 명언을 써 놓으셨습니다.

꿈을 잃지 말라.

-장영실

 

그때만 해도 고등학교 진학을 못하는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선생님은 그날, 꿈에 부푼 졸업식날, 그들을 생각하셨던 겁니다. 그때 그들 속엔 나도 끼어있었습니다. 어머니의 장기간 입원 때문에 고등학교 진학을 그만 접어야 했습니다. 만일 그때, 그분께서 하신 그 ‘장영실 명언’이 없었더라면 나는 그로부터 3년 뒤 다시 일어서지 못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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