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통 속 페이퍼 나이프
권영상
아파트 창문 바깥으로 뭉게구름이 핀다. 일어나 뒷베란다로 나가 창문 밖 하늘을 쳐다봤다. 무역센터 쪽 하늘에서 희고 부드러운 뭉게구름이 일어난다. 볼수록 텅 빈 마음이 가득가득 차오른다. 오랜 비 끝에 보는 뭉게구름이다. 가을이 왔다는 신호다. 하늘이 만들어주는 선물 중에 이만한 선물이 또 있을까.
뭉게뭉게 피는 구름을 보려니 누군가가 그립다. 가을이 연출하는 이 위대한 그리움의 세계에 빠져들다가 돌아섰다. 책상 의자에 털썩 앉았다. 내 눈에 여태 보이지 않던 페이퍼 나이프가 들어온다. 책상 앞 연필통에 꽂혀있는 편지봉투를 여는 나무칼이다. 기룸한 나무칼 자루 끝에 기린의 머리를 조각한 수공품이다. MADE IN KENYA라는 표딱지가 나무빛깔로 물든 채 그대로 붙어있다. 20여 년 전 아프리카 토산품 전에서 산 기억이 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자주 편지를 썼다.
늘 안부가 목마른 지인에게, 또는 어머니에게, 또는 문단의 동료나 선배들에게 주로 편지를 했다. 종종 썼지만 종종 받기도 했다. 이 페이퍼 나이프도 어쩌면 그 무렵에 산 것일지도 모르겠다. 봉투를 손으로 찢어 여는 것이 싫었다. 부치는 분은 예를 다해 붙였을 텐데 그렇게 여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다.
그럴 때에 페이퍼 나이프를 대면 좋다. 반듯하게 열겠다는 마음가짐 자체가 좋다. 보내는 분의 마음만큼 열어보는 일의 경건함이 필요하다. 편지란 보낸 분의 숨결이 배어있는 또 하나의 인격체이기 때문이다. 그런 공경함이 있어야 펜을 눌러 글을 쓴 분의 심중을 오해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손으로 쓴 편지의 교류에는 그런 향기가 있었다. 사람을 존중하고, 인품을 높이고, 서로의 삶을 경외하거나 그리움을 고무하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내가 한 때 즐겨 쓰던 편지 필기용구는 먹을 갈아 쓰는 붓이었다. 어머니에게 배운 대로 내겐 먹이 오히려 불편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휴대폰이 생기면서부터 편지 쓰는 일이 뜸해졌다. 그러나 출판한 시집을 보내주는 분에게는 그 고충을 충분히 알기에 보갚음을 위해서도 감사의 편지를 드렸다. 봉함편지로 시작하다가 그마저 언젠가부터 글잣수가 적은 엽서로 변했다. 글씨도 붓 대신 먹물 느낌이 드는 쉬운 수성 펜으로 바뀌었다. 그러면서 서서히 내 연필통 속에 꽂힌 페이퍼 나이프는 한 때 사랑을 알았던 기억처럼 내 손에서 서서히 멀어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내 책상 위에 놓였으나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세상의 모든 것이 이메일이나 휴대폰의 문자 메시지처럼 신속하고 간편해져 갈 때다. 뜻밖에도 놀라운 책 한 권을 구했다. 화가 김점선의 글과 그림이 실린 책 <바보들은 이렇게 묻는다>였다. 제책 방식이 독특했다. 한 장 한 장 책장을 찢어가며 읽는 책이었다. 나는 책에 딸려온 나이프 대신 내 필통에 꽂힌 목제 기린 나이프로 그 일을 하며 책을 읽었다. 읽는다기보다 천천히 음미한다는 말이 옳았다. 책장을 페이퍼 나이프로 자를 때마다 활짝 드러나는 김점선 특유의 어눌한, 아니 틱틱거리는 듯 한 화법과 그의 원색에 가까운 컴퓨터 그래픽. 그리고 책장을 자를 때 생기는 종이 보풀과 그 보풀이 쌓여 끝부분만 두툼해지는 책의 질감이 정겨웠다.
책 한 권을 읽고도 수 백 권을 읽은 듯 마음이 뿌듯해지거나 경건해지던 배후엔 페이퍼 나이프가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연필통에 꽂혀 잠자던 페이퍼 나이프를 집어들었다. 그 순간이다. 나이프에 감염된 듯 그 누군가를 향해 편지를 쓰고 싶다는 마음이 일었다. 책장 속에 넣어둔 벼루에 불현 눈이 갔다. 험난한 세상일에 지친 그 누구의 마음을 뭉게구름처럼 피어나게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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