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두렁길을 한 바퀴 돌다
권영상
비가 그쳤습니다. 태풍이 오네 마네, 장마가 오네마네 하더니 가을입니다. 남쪽엔 장마 피해가 있었던 모양이지만 이쪽 제가 사는 안성엔 비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장마가 아주 갔다고 했는데 웬일인지 몇 며칠을 비가 내립니다.
오늘도 종일 오는 비 때문에 집안에 갇혀 있었지요. 그런데 오후 4시가 지날 즈음 비가 그을 듯이 멈춤멈춤 합니다. 비 그친다고 이 시골에서 마땅히 갈 곳이 있을 리 없습니다. 김장은 안 할 거지만 몇 고랑 무씨를 뿌리고, 순무씨도 또 몇 고랑 뿌리고, 가을상추며 쑥갓도 한 판 뿌렸습니다. 그 사이 또 한 차례 고추도 따서 말렸지요. 그 일만으로도 바쁘지요.
그렇기는 해도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습니다. 요 언덕 너머 벽장골 논벌입니다. 벼는 얼마나 컸는지 궁금했지요. 오랫동안 쌀을 먹으며 살아와 그런지 논에 가보고 싶습니다. 나는 낡은 등산화를 고쳐 신었습니다. 그리고는 비와 비 사이, 비가 없는 이때를 골라 벽장골 논두렁길을 타고 나갔지요. 쭉 펼쳐진, 농기계가 다닐만한 논두렁길 양편으로 벼가 한창 푸르게 큽니다. 그득히 자라는 벼를 보려니 내 빈한한 속이 뿌듯해집니다.
길을 멈추고 앉아 벼포기를 헤쳐 봅니다. 포기가 많이 벌었습니다.
“잘 커주어 고맙구나!”
나도 모르게, 내 논의 벼도 아닌 남의 벼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습니다.
바로 그때입니다. 나의 인사에 대한 답례일까요. 저만치 논두렁길로 뒤뚱거리며 마구 내달리는 놈이 있습니다. 아니, 저게 뭘까, 하다가 나도 뒤따라 뛰었습니다. 검정 털모자가 바람에 데굴데굴 굴러가듯 달려갑니다. 논병아리입니다. 얼마껀 쫓아가자, 논병아리는 논으로 냅다 뛰어내리더니 그만 슬몃 사라집니다. 화면이 확 바뀌어버린 영화의 장면처럼 갑자기 허전합니다. 그래도 거기까지 쫓아가 벼포기 사이를 헤쳐 봅니다. 고요합니다. 벼들이 숨겨주는지 벼포기 하나 흔들리지 않습니다. 달아나도 벌써 먼 곳에 가 숨어있겠지요.
‘그 놈 참, 빠르기도 하지.’
그러며 걸어가는 내 머리에 번쩍, 스치는 게 있습니다. 논병아리가 나를 속인 겁니다. 제 둥지가 내 눈에 띌까봐 일부터 논두렁길로 뛰어나와 뒤뚱뒤뚱 달리면서 나의 시선을 훔쳐갔던 겁니다. 나는 얼른 돌아서서 둥지가 있음직한 쪽을 살펴봅니다. 그 어디쯤 논병아리 새끼들이 내 눈길이 무서워 숨죽이고 있겠지요. 그럴까요. 어쩌면 제 어미의 유혹에 속아 뜀박질해가던 내 꼴을 보고 대굴대굴 굴면서 웃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쫓아가 그들을 보고 싶었지만 말았습니다. 나를 멋지게 속여 넘긴 제 어미의 실력을 자식들 앞에서 괜히 폄하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밤나무 숲에서 나는 왼쪽 논두렁길로 들어섰습니다. 꼴꼴꼴꼴, 그쪽 어느 도랑에서 물소리가 났습니다. 우중이니 어느 논에 물꼬를 열어둔 게 분명합니다. 가만히 다가가 풀숲을 열고 물꼬를 들여다봅니다. 물꼬 바닥에 빈 비료 포대를 깔아놓았습니다. 무논에서 밀려오는 맑은 물이 배를 깔며 봇도랑으로 떨어집니다. 물꼬는 논의 숨통이지요. 이 숨통을 너무 열어 놓으면 논물이 다 빠져 벼가 포기배기를 못합니다. 너무 또 가두어 놓으면 벼 대궁이가 물에 젖어 병에 걸릴 위험이 있지요. 그러니 이 물꼬야말로 벼의 목숨을 건사하는 숨통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풀숲을 헤치고 나오며 보니, 내가 헤친 것이 풀이 아니고 콩입니다. 콩을 논섬에다 쪽 심어놓았는데 벼만큼 장성했습니다. 이 논의 주인장이 누구신지 참 부지런하고 성실한 분 같습니다. 예전 고향의 아버지께서도 반달배미 논섬 둑을 비워두는 게 아까워 뱅 돌아가며 쥐눈이콩을 심으셨지요.
저어쪽, 산등성이 고구마밭 쪽 논에 하얀 황새 한 마리가 날아와 있군요. 초록이 가득한 이즈음의 논에 황새(백로) 한 마리라. 아주 그럴싸한 우리나라 논벌의 풍경입니다. 성큼성큼 벼포기 사이를 걷던 황새가 우뚝 서서 내 쪽을 보네요. 한 마리입니다. 황새는 다녀도 꼭 혼자 다닙니다. 논벌에 놀러와도 꼭 혼자 오고, 혼자 그 넓은 하늘을 외롭게 날아다닙니다. 그런 까닭에 망도 저 혼자 보고, 먹잇감도 저 혼자 찾고, 저 혼자 먹고, 날아오고 날아갈 일도 저 혼자 결정합니다. 그게 고독을 즐기는 황새의 노고입니다. 사람과도 가까운 거리가 아닌, 되도록이면 멀찍한 거리를 두고 논벌에 서 있습니다. 황새는 그야말로 거리의 미학에 신중한 새입니다.
작년 겨울에 본 샘논을 찾았습니다. 논바닥이 바짝 얼었을 때도 한 곳만은 얼지 않아 새들이 모여들던 그 샘논입니다. 가만히 살펴보니 샘물이 돌던 곳은 벼포기가 노랗습니다. 늘 샘이 솟구쳐나는 곳이니 지력이 약할 테지요. 모르기는 해도 샘이 나오느라 그 안에서 가는 모래들이 운동을 하고 있을 테지요.
인적을 느꼈는지 오리 두 마리가 후두두 논에서 날아오릅니다. 날아올라선 내 머리 위를 한바퀴, 쉭쉭쉭 소리를 내며 날더니 과수원 쪽 하늘로 날아갑니다. 어느 쪽엔가 호수나 늪이 있는 모양입니다. 모내기를 하던 무렵에도 물오리 날아가는 것을 창가에 서서 보았지요. 꽤 먼 곳에 덕산저수지가 있단 말은 들었는데 거기서 여기까지 날아올까요. 물이 흔한 계절이고 보면 이 너른 벽장골 무논에서 물오리 몇 마리쯤이야 쉬이 살 수 있겠지요.
오랜만에 논두렁길을 한 바퀴 돌아왔습니다.
내 몸이 논에서 한창 크는 초록빛처럼 파래졌습니다.
논두렁길을 다녀왔으니 저녁에는 밥솥에 쌀을 안쳐도 부끄럽지 않겠어요. 밥 먹을 자격이 있을 듯합니다. 오늘 쌀통에서 뜨는 쌀에도 나를 속이던 논병아리가 숨어있을 테고, 황새가 날고, 물꼬에서 빠지던 꼴꼴꼴 물소리가 숨어있을 테지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혼자서 피를 뽑으시던 아버지의 지난 과거도 깃들어 있을 테지요.
오늘 저녁은 여느 날과 달리 별로 밥맛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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